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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일에_관한_규정_16장_1-34절 [2023/10/26 16:54] – [본문분석 - 의식의 세부적인 지침(16:11-28) [발제자 : 이주복, 황현철]] kungsik | 속죄일에_관한_규정_16장_1-34절 [2023/12/05 23:13] (현재) – [본문분석 - 의식의 세부적인 지침(16:11-28) [발제자 : 이주복, 황현철]] 218.50.173.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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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문의 전체적인 구조 ] ** | ** [ 본문의 전체적인 구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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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6장에는 속죄일 의식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이 내용은 크게 의식의 개요, 세부적인 지침, 요약과 같은 구조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Gordon J. Wenham / 김귀탁 옮김,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257.)) 이에 대한 구체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해당 구조는 마크 루거와 고든 웬함의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Mark F. Roooker / 차주엽 옮김, 『NAC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264.))((Gordon J. Wenham, 『레위기』, 257.)) | 레위기 16장에는 속죄일 의식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이 내용은 크게 의식의 개요, 세부적인 지침, 요약과 같은 구조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Gordon J. Wenham / 김귀탁 옮김,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257.)) 본문은 속죄일에 관한 명령으로 시작된다. 초반 개요에서는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어떤 의복과 제물을 갖춰야 하는지 지시된다. 그 후에는 의식의 세부적인 지침이 제시된다. 제사는 제사장을 위한 속죄와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로 구분하여 진행된다. 그 후 아사셀 염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속죄일을 영원히 지킬 것과 그 날짜가 지시된다. 그리고 속죄일 규례에 대한 요약이 이뤄진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해당 구조는 마크 루거와 고든 웬함의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Mark F. Roooker / 차주엽 옮김, 『NAC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264.))((Gordon J. Wenham, 『레위기』, 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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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속죄일에 관한 명령 (16:1-10) ** | ** 1. 속죄일에 관한 명령 (16:1-10) ** |
우선 본문이 포로기보다 앞서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웬함이 지적한 것과 같이 소위 P자료와 포로기 이후의 어휘가 유사하지 않다. 늦은 저작으로 볼 이유가 없다.((위의 책, 27.)) 둘째. 정교한 의식은 이미 이른 시기, 심지어 모세 이전 시기에도 고대 근동에서 발견된다.((위의 책, 23.)) 셋째. 포로기에 기술 된 에스겔서에서는 레위기를 언급한다.(예를 들어 에스겔서 22장 26절은 레위기 10장 10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의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위의 책, 23.)) 벨하우젠은 에스겔서가 레위기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성경 본문 내적으로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Mark F. Roooker, 『NAC 레위기』, 42.)) 넷째. 후기 저작설의 이론적, 실제적 근거가 없다. 후기 저작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적 철학에 입각하여 무언가가 계속 고등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종교도 그렇게 발전했을 것이므로 복잡한 제의는 마지막에 등장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가 그렇게 발달했을 것이라는 주장, 다신교에서 시간을 지나 유일신교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위의 책, 37-38.)) 그리하여 포로기 시대 이후 후기 저작설은 배격된다. | 우선 본문이 포로기보다 앞서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웬함이 지적한 것과 같이 소위 P자료와 포로기 이후의 어휘가 유사하지 않다. 늦은 저작으로 볼 이유가 없다.((위의 책, 27.)) 둘째. 정교한 의식은 이미 이른 시기, 심지어 모세 이전 시기에도 고대 근동에서 발견된다.((위의 책, 23.)) 셋째. 포로기에 기술 된 에스겔서에서는 레위기를 언급한다.(예를 들어 에스겔서 22장 26절은 레위기 10장 10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의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위의 책, 23.)) 벨하우젠은 에스겔서가 레위기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성경 본문 내적으로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Mark F. Roooker, 『NAC 레위기』, 42.)) 넷째. 후기 저작설의 이론적, 실제적 근거가 없다. 후기 저작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적 철학에 입각하여 무언가가 계속 고등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종교도 그렇게 발전했을 것이므로 복잡한 제의는 마지막에 등장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가 그렇게 발달했을 것이라는 주장, 다신교에서 시간을 지나 유일신교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위의 책, 37-38.)) 그리하여 포로기 시대 이후 후기 저작설은 배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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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본문이 모세시대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근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전통적 견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뤄졌지만 본문은 모세가 해당 본문의 내용을 받았음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본문 내적으로 보면 모세와 본문의 기원은 떼어놓을 수 없다. 둘째. 본문이 말하는 배경은 후대의 정착 상황이나 포로기 정황과는 거리가 멀다. | 다음으로 본문이 모세시대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근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전통적 견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뤄졌지만 본문은 모세가 해당 본문의 내용을 받았음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본문 내적으로 보면 모세와 본문의 기원은 떼어놓을 수 없다. 둘째. 본문이 말하는 배경은 후대의 정착 상황이나 포로기 정황과는 거리가 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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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뿐 아니라 모세오경이 오래 된 글이요, 뿐만 아니라 모세에게 기원을 두고 있는 글이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확고한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성경 곳곳에서 드러난다. 우선 모세오경 자체에 모세와 오경의 기원을 연결하는 표현, 또는 모세가 기록에 관여했다는 사실(예컨대 출애굽기 24장 4절)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또 역대기, 느헤미야 등 포로기 이후 문서에도 모세와 율법을 연결하는 언급이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도 오경을 모세와 연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위의 책, 44.))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교회사에서도 오래간 부정되지 않았다. | 레위기 뿐 아니라 모세오경이 오래 된 글이요, 뿐만 아니라 모세에게 기원을 두고 있는 글이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확고한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성경 곳곳에서 드러난다. 우선 모세오경 자체에 모세와 오경의 기원을 연결하는 표현, 또는 모세가 기록에 관여했다는 사실(예컨대 출애굽기 24장 4절)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또 역대기, 느헤미야 등 포로기 이후 문서에도 모세와 율법을 연결하는 언급이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도 오경을 모세와 연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위의 책, 44.))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교회사에서도 오래간 부정되지 않았다. |
이처럼 ‘향연’으로 증거궤 위 ‘캅포레트’를 가리는 이유를 가리켜 그 발판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Nobuyoshi Kiuchi, 『레위기』, 390.)) 또한, 향연을 연관시키는 본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하틀리는 여호와를 향한 분향의 효력은 민수기 16:43-50에 언급된 고라의 반역 사건과 본문의 내용을 연결한다.((John E. Hartley/김경열 옮김, 『레위기』 WBC 4 (서울: 솔로몬, 2006), 507-508.)) | 이처럼 ‘향연’으로 증거궤 위 ‘캅포레트’를 가리는 이유를 가리켜 그 발판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Nobuyoshi Kiuchi, 『레위기』, 390.)) 또한, 향연을 연관시키는 본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하틀리는 여호와를 향한 분향의 효력은 민수기 16:43-50에 언급된 고라의 반역 사건과 본문의 내용을 연결한다.((John E. Hartley/김경열 옮김, 『레위기』 WBC 4 (서울: 솔로몬, 2006), 507-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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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서 여호와의 진노는 고라와 그의 가족들을 항해 촉발되었으며 온 회중에게 임하는 듯했으나 아론은 급히 향로를 취해 거기에 제단에서 가져온 불을 놓고 그 불 위에 향을 피웠다. 이어서 그는 재빨리 백성들을 위한 대속을 시행하려고 회중 안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분향과 향기라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뜻을 함의하며,((Mark F. Roooker/차주엽 옮김, 『NAC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105-106.)) 이는 마치 노아의 제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노아의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이환진, 『레위기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13), 316.)) 이는 예언서에도 전제되어 있는 내용으로써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데 목적을 두며, 레위기 16장에서 언급되는 ‘향연’은 이러한 이해가 담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사건에서 여호와의 진노는 고라와 그의 가족들을 항해 촉발되었으며 온 회중에게 임하는 듯했으나 아론은 급히 향로를 취해 거기에 제단에서 가져온 불을 놓고 그 불 위에 향을 피웠다. 이어서 그는 재빨리 백성들을 위한 대속을 시행하려고 회중 안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분향과 향기라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뜻을 함의하며,((Mark F. Roooker/차주엽 옮김, 『NAC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105-106.)) 이는 마치 노아의 제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노아의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김상기, 『레위기Ⅰ』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13), 316.)) 이는 예언서에도 전제되어 있는 내용으로써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데 목적을 두며, 레위기 16장에서 언급되는 ‘향연’은 이러한 이해가 담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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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고든 웬함과 이환진은 이를 시내 산 현현 사건의 제의적 재현이라고 주장하며, 향연을 피워 죽음을 피하는 대제사장의 모습을 출애굽기 19장과 연결짓는데, 여호와의 임재와 그 앞에서 자신을 감추는 대제사장이라는 속죄일의 독특한 맥락에서 볼 때 이들의 견해 또한, 타당해 보인다.((Gordon J. Wenham/김귀탁 옮김,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258.)) 이와 같은 분향의 과정을 마친 후에 아론은 카포레트 앞에 수소의 피를 손가락으로 일곱 번 뿌려야 했는데 그 이유는 7은 완전 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성소에 피를 가져가 뿌리는 것은 속죄일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며 오직 속죄일에만 지성소에 피를 가져가는 것은 속죄일의 엄숙함을 강조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Mark F. Roooker, 『NAC 레위기』, 273.)) | 다음으로, 고든 웬함과 김상기는 이를 시내 산 현현 사건의 제의적 재현이라고 주장하며, 향연을 피워 죽음을 피하는 대제사장의 모습을 출애굽기 19장과 연결짓는데, 여호와의 임재와 그 앞에서 자신을 감추는 대제사장이라는 속죄일의 독특한 맥락에서 볼 때 이들의 견해 또한, 타당해 보인다.((Gordon J. Wenham/김귀탁 옮김,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258.)) 이와 같은 분향의 과정을 마친 후에 아론은 카포레트 앞에 수소의 피를 손가락으로 일곱 번 뿌려야 했는데 그 이유는 7은 완전 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성소에 피를 가져가 뿌리는 것은 속죄일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며 오직 속죄일에만 지성소에 피를 가져가는 것은 속죄일의 엄숙함을 강조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Mark F. Roooker, 『NAC 레위기』, 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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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성소 안에서 이뤄지는 지성소와 회막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속죄 (16:15-19)** | ** 3. 지성소 안에서 이뤄지는 지성소와 회막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속죄 (16:15-19)** |
18절의 “제단”은 바깥 제단이다.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란 표현은 8장 15절의 표현을 상기시키며, 이 의식이 제단을 다시 바치기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대제사장이 피를 뿌림으로써 제단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레위기에서 8:15과 16:19에만 등장하는 표현이다.((John E. Hartley, 『레위기』, 509-510.)) 그렇다면, 어떠한 신학적인 의도가 여기에 숨어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도는 속죄일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 있는데, 8:11, 15와 16:18-19의 구조를 비교하며 속죄일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해석하는 키우치의 견해가 앞선 필자의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견해로 보인다. | 18절의 “제단”은 바깥 제단이다.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란 표현은 8장 15절의 표현을 상기시키며, 이 의식이 제단을 다시 바치기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대제사장이 피를 뿌림으로써 제단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레위기에서 8:15과 16:19에만 등장하는 표현이다.((John E. Hartley, 『레위기』, 509-510.)) 그렇다면, 어떠한 신학적인 의도가 여기에 숨어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도는 속죄일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 있는데, 8:11, 15와 16:18-19의 구조를 비교하며 속죄일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해석하는 키우치의 견해가 앞선 필자의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견해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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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우치에 의하면, 8장과 16장은 번제단을 정화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의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의식 사이에는 순서의 역전이 발생한다. 우선, 8장에서 언급되는 제사장의 위임식에서는 번제단에 기름을 뿌린 후에(8:11) 수송아지의 피를 뿌린다(8:15). 그러나 16장에서는 먼저 피를 바른 후에 피를 뿌린다.((Nobuyoshi Kiuchi, 『레위기』, 394.)) 그러므로, 이와 같은 순서의 역전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속죄’가 재생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16;18-19에서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한 속죄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깨끗함과 거룩함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깨끗함과 거룩함을 함축하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요구할 것이다. 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그 가운데 있는 성막의 관계는 <백성의 죄> → <성막 오염> → <성막의 정화와 거룩함> → <백성의 정화와 거룩함과 그에 상응하는 삶의 요청>이라는 일종의 순환 관계라고 할 수 있고, 완전한 속죄는 지성소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환진, 『레위기Ⅱ』, 319-320.)) | 키우치에 의하면, 8장과 16장은 번제단을 정화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의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의식 사이에는 순서의 역전이 발생한다. 우선, 8장에서 언급되는 제사장의 위임식에서는 번제단에 기름을 뿌린 후에(8:11) 수송아지의 피를 뿌린다(8:15). 그러나 16장에서는 먼저 피를 바른 후에 피를 뿌린다.((Nobuyoshi Kiuchi, 『레위기』, 394.)) 그러므로, 이와 같은 순서의 역전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속죄’가 재생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16;18-19에서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한 속죄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깨끗함과 거룩함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깨끗함과 거룩함을 함축하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요구할 것이다. 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그 가운데 있는 성막의 관계는 <백성의 죄> → <성막 오염> → <성막의 정화와 거룩함> → <백성의 정화와 거룩함과 그에 상응하는 삶의 요청>이라는 일종의 순환 관계라고 할 수 있고, 완전한 속죄는 지성소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김상기, 『레위기Ⅰ』, 319-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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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사셀 염소에 대한 세부 규례 (16:20-22)** | ** 4. 아사셀 염소에 대한 세부 규례 (16:20-22)** |
대제사장 아론은 속죄일 의례를 마친 후에 세마포 옷을 벗고, 물로 자기 몸을 씻고, 더 화려한 의복을 입는다. 아론이 목욕 후에 거룩한 세마포 옷에서 자신의 일상적인 옷으로 갈아입는 것에 대해서는 하틀리의 “거룩함의 제거”로 해석하지만,((John E. Hartley, 『레위기』, 511-512.)) 키우치의 “부정함의 정화”가 더 나은 견해로 보인다. 방금까지 가장 거룩한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론은 어떠한 이유에서 부정하게 되었는가? 오염의 근거는 가장 높은 수준의 거룩함으로부터 더 낮은 수준의 거룩함으로 이동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Nobuyoshi Kiuchi, 『레위기』, 397.)) | 대제사장 아론은 속죄일 의례를 마친 후에 세마포 옷을 벗고, 물로 자기 몸을 씻고, 더 화려한 의복을 입는다. 아론이 목욕 후에 거룩한 세마포 옷에서 자신의 일상적인 옷으로 갈아입는 것에 대해서는 하틀리의 “거룩함의 제거”로 해석하지만,((John E. Hartley, 『레위기』, 511-512.)) 키우치의 “부정함의 정화”가 더 나은 견해로 보인다. 방금까지 가장 거룩한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론은 어떠한 이유에서 부정하게 되었는가? 오염의 근거는 가장 높은 수준의 거룩함으로부터 더 낮은 수준의 거룩함으로 이동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Nobuyoshi Kiuchi, 『레위기』, 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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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의 이동은 곧 자기를 숨기는 것, 부정하게 되는 것과 관련이 되는데 구약의 본문에서 스스로를 숨기는 것(‘하타트’)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죄’로 간주되며 곧 부정한 것의 정화와 관련이 된다.((Nobuyoshi Kiuchi, 『레위기』, 39.))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더 낮은 거룩으로 이동하는 아론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숨기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부정해지며 이를 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씻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나실인이 자신의 서원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을 때 속죄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으며(민 6:14), 이환진 또한, 키우치와 같은 견해를 보이기 때문에 이 견해는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이환진, 『레위기Ⅱ』, 324.)) | 거룩함의 이동은 곧 자기를 숨기는 것, 부정하게 되는 것과 관련이 되는데 구약의 본문에서 스스로를 숨기는 것(‘하타트’)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죄’로 간주되며 곧 부정한 것의 정화와 관련이 된다.((Nobuyoshi Kiuchi, 『레위기』, 39.))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더 낮은 거룩으로 이동하는 아론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숨기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부정해지며 이를 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씻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나실인이 자신의 서원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을 때 속죄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으며(민 6:14), 이환진 또한, 키우치와 같은 견해를 보이기 때문에 이 견해는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김상기, 『레위기Ⅰ』, 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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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아론과 백성을 위한 번제 (16:24b-25)** | ** 6. 아론과 백성을 위한 번제 (16:24b-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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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적용 (발제자: 박상현) ==== | ==== 본문의 적용 (발제자: 박상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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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죄일 제사가 다른 제사와 의미적으로 혹은 해석적으로 구별되는 내용을 언급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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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일은 신약의 저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히브리서 기자에게 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구약 의식의 궁극적 불충분성을 강조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모형이었다. 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물 희생제사는 여러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상응한다. 이 특별한 날에 휘장 뒤로 들어갈 수 있는 이는 오 | 속죄일은 신약의 저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히브리서 기자에게 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구약 의식의 궁극적 불충분성을 강조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모형이었다. 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물 희생제사는 여러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상응한다. 이 특별한 날에 휘장 뒤로 들어갈 수 있는 이는 오 |
직 대제사장뿐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모형이었던 성막의 원형인 천상의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셨으며.(히 9:23~24) 자신의 피를 속죄제물 삼아 지성소로 단번에 들어가셨다.(히 9:12) 라우바흐는 ‘그리스도의 피’가 신약의 사상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하며 이 의미는 특별히 속죄일 희생 제물에서 이끌어 낸 것이라고 주장한다.((Mark F. Roooker/차주엽 옮김, 『NAC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282.)) | 직 대제사장뿐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모형이었던 성막의 원형인 천상의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셨으며.(히 9:23~24) 자신의 피를 속죄제물 삼아 지성소로 단번에 들어가셨다.(히 9:12) 라우바흐는 ‘그리스도의 피’가 신약의 사상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하며 이 의미는 특별히 속죄일 희생 제물에서 이끌어 낸 것이라고 주장한다.((Mark F. Roooker/차주엽 옮김, 『NAC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282.)) |
그리스도를 ‘힐라스테리온(화목제물)’으로 지칭하는 것 역시 모형론적 의미를 갖는다.((앞의 책, 284.)) | 그리스도를 ‘힐라스테리온(화목제물)’으로 지칭하는 것 역시 모형론적 의미를 갖는다.((앞의 책, 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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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일에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를 괴롭게 해야 했고,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는 개인의 통회가 죄사함에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기 원하는 자는 반드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자기 죄를 인정하며, 그 죄를 끊어내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타국인이나 거류민도 이날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거류민에게도 역시 여호와께 순종할 것이 요구되었으며 이는 신약에서 이방인 회심의 근거가 된다.((앞의 책, 280.)) | 속죄일에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를 괴롭게 해야 했고,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는 개인의 통회가 죄사함에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기 원하는 자는 반드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자기 죄를 인정하며, 그 죄를 끊어내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타국인이나 거류민도 이날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거류민에게도 역시 여호와께 순종할 것이 요구되었으며 이는 신약에서 이방인 회심의 근거가 된다.((앞의 책, 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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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죄일 제사가 다른 제사와 의미적으로 혹은 해석적으로 구별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
| * 일년 중 속죄일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속죄 덮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자,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시는 현장이었다. 이날 대제사장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취하실 일의 맛보기였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히 4:14~16 ; 10:19~22)((앞의 책, 267-268.)) |
| *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평소 수행할 때 입었던 옷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세마포 옷을 입었다. 이는 속죄를 구하는 대제사장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낸다.((앞의 책, 269.)) |
| *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드린 후, 피운 불과 향을 휘장 안으로 가져갔다. 또 수소의 피를 손가락으로 시은좌 앞에 일곱 번 뿌려야 했다. 지성소에 피를 가져가 뿌리는 것은 속죄일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다. 이는 속죄일의 독보적 엄숙함을 강조한다. 시은좌는 궤를 덮고 있는데 궤 안에는 십계명, 만나,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었고 , 이 물품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을 강조한다. 따라서 시은좌 위의 피는 이스라엘의 죄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속죄되었음을 나타낸다.((앞의 책, 272-273.)) |
| * 백성을 위한 속죄제가 드려진 후에는 성막 내부의 여러 물품이 정화되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반역으로 말미암은 죄가 속죄되었다. 속죄일에는 고의로 저지른 죄가 속죄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성막이 정화되는 날이었다.((앞의 책, 274.)) |
| * 다음으로 번제단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 아론은 제단 위에 피를 일곱 번 뿌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정결하게 했다. 젠슨은 정화 절차에 주목하며 가장 거룩한 물건(시은좌)으로부터 - 회막과 마지막으로 번제단이 정화되었다.((앞의 책, 275.)) |
| * 다음으로 아론은 살아 있는 염소에게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의 죄악과 반역을 참회했다. 이어서 염소는 광야로 보내졌다. 속죄일의 또 독특한 특징이 여기에서 발견되는데, 희생 제사 동물에게 한 손을 얹은 이전의 기록들(1:4; 3:2,8,13; 4:4,24,29,33)과는 달리, 대제사장은 동물에게 두 손을 얹는다. 조하르는 한 손에서 두 손으로 강화되는 것은 고의적인 죄들이 이전되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제사자가 아닌 대제사장이 동물에게 손을 얹는다. 아론은 민족 대표로서 전체 민족을 위해 중재하고, 죄는 가장 철저한 방식으로 다뤄질 것이다.((앞의 책, 276.)) |
| * 아사셀 염소는 속죄의 결과, 죄책의 제거를 묘사한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성취된다. 본문에서 염소가 불의를 “짊어지는 것”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단어 ‘나싸’는 이사야 53장 4절과 12절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앞의 책, 277.)) |
| * 속죄일에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를 부정해야 했고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전통적으로 이 명령은 금식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모세 율법에 있는 유일한 금식일이다. 이는 통회가 죄사함에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를 낮추고, 죄를 인정하며 죄를 끊어내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모든 타국인도 이날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는 거류민에게도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순종할 것이 기대되었음을 의미하며 신약에서 이방인들의 회심을 예시한다.((앞의 책, 279-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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