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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고대근동문학:예언 [2024/05/20 11:22] – [에살하돈의 신탁 - 앗수르의 국가 기록물] kungsik | 2024고대근동문학:예언 [2024/05/27 13:50] (현재) – [예언] kungs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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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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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벨라의 이쉬타르 |
===== 문헌의 역사적 배경 (신왕철) ===== | ===== 문헌의 역사적 배경 (신왕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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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살핫돈의 왕위 계승 배경 ==== | ==== 에살핫돈의 왕위 계승 배경 ==== |
* 에살핫돈은 아버지 산헤립이 히스기야 왕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죽임당한 뒤에 산헤립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왕하19장) 이 과정에서 교재의 모음집(SAA 9 1)은 후대에 편찬돼었지만, 주전 681년의 사건과 관련된 신탁을 포함하는데, 그때 에살핫돈이 아버지 산헤립이 죽은 후 왕위를 차지하려고 자기 형제들과 전쟁을 벌였다고 기술되어있다. 또 다른 모음집(SAA 9 2)에는 자기 형제들을 무찌른 후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려 할 때인 680-679년에 새로운 왕에게 주는 위로의 신탁이 있었다. 거짓과 부패를 언급하는 것은 같은 시대의 역사 비문처럼 에살핫돈의 왕위 등극이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며 어려웠음이 있었음을 가리킨다.((크리스토퍼 B.헤이즈, 고대근동문학,2018, 466p 참고)) 이러한 상황 때문에 그에게 위로의 예언과 그의 왕권을 강화할 예언이 필요해 보인다. | * 산헤립은 장자의 죽음 이후 기원전 683년경 최종적으로 막내아들인 30세의 에살핫돈을 둘째 아들인 아르다드물리시(Ardar-Mulishi)대신 제국의 후계자로 지정했다.((이종근, 메소포타미아와 잠언의 운명관에 대한 연구-신앗시리아 제국의 에살핫돈의 불길예감을 중심으로, 2018,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07집, p68 참고)) 이런 결정에는 산헤립의 후처인 나키아(Naqia/Zakutu)의 지원이 있었다. 이러한 후계자 선택은 내부의 갈등과 부화를 야기했고, 상황이 악화되어 산헤립이 에살핫돈을 갈그미스의 서쪽 알려지지 않은 레바논으로 피신하게 만들었고 최종적으로 산헤립의 죽음을 불러왔다. 이렇게 산헤립은 둘째 아들인 아르다물리시에 의해 기원전 681년에 살해되었다. ((ibid, 69p 참고)) 에살핫돈은 아버지 산헤립이 히스기야 왕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죽임당한 뒤에 산헤립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왕하19장) 이 과정에서 교재의 모음집(SAA 9 1)은 후대에 편찬돼었지만, 주전 681년의 사건과 관련된 신탁을 포함하는데, 그때 에살핫돈이 아버지 산헤립이 죽은 후 왕위를 차지하려고 자기 형제들과 전쟁을 벌였다고 기술되어있다. 또 다른 모음집(SAA 9 2)에는 자기 형제들을 무찌른 후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려 할 때인 680-679년에 새로운 왕에게 주는 위로의 신탁이 있었다. 거짓과 부패를 언급하는 것은 같은 시대의 역사 비문처럼 에살핫돈의 왕위 등극이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며 어려웠음이 있었음을 가리킨다.((크리스토퍼 B.헤이즈, 고대근동문학,2018, 466p 참고)) 이러한 상황 때문에 그에게 위로의 예언과 그의 왕권을 강화할 예언이 필요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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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서7-8장의 배경 ==== | ==== 이사야서7-8장의 배경 ==== |
에살하돈의 신탁 : 아르벨라의 이슈타르라는 ‘신’은 에살핫돈 왕을 도우며 그에게 신적인 약속을 부여한다. 이슈타르는 자신을 ‘위대한 여신’이라고 소개하며 에살핫돈과 함께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과거에 그(에살핫돈)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했으며 자신의 계획과 약속 안에서 태어났음을 이야기한다. 그 후 에살핫돈의 왕위가 ‘신’의 계획 아래에서 수립되어졌으며 그의 대적들을 자신이 직접적으로 없애버리는 즉, 신적인 보호와 동행이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 에살하돈의 신탁 : 아르벨라의 이슈타르라는 ‘신’은 에살핫돈 왕을 도우며 그에게 신적인 약속을 부여한다. 이슈타르는 자신을 ‘위대한 여신’이라고 소개하며 에살핫돈과 함께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과거에 그(에살핫돈)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했으며 자신의 계획과 약속 안에서 태어났음을 이야기한다. 그 후 에살핫돈의 왕위가 ‘신’의 계획 아래에서 수립되어졌으며 그의 대적들을 자신이 직접적으로 없애버리는 즉, 신적인 보호와 동행이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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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의 신탁 :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그의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 '아하스'에게 그의 약속과 메세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반복해서 그의 약속과 메세지를 잊어버릴 때 마다 다시 이사야를 통해서 그 마음을 전달한다.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는 그의 백성을 지키시며 자신의 전능한 위력으로 그들의 원수들을 뒤덮으실 수 있기에 자신을 의지하고 앙모하며 바라기를 소망하고 권고한다. | 이사야서의 신탁 :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그의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유다의 왕 '아하스'에게 그의 약속과 메세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유다 백성이 반복해서 그의 약속과 메세지를 잊어버릴 때 마다 다시 이사야를 통해서 그 마음을 전달한다.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는 그의 백성을 지키시며 자신의 전능한 위력으로 그들의 원수들을 뒤덮으실 수 있기에 자신을 의지하고 앙모하며 바라기를 소망하고 권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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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서가 쓰여진 시대에 발생했던 예언 문학의 다양성 ==== | ==== 구약성서가 쓰여진 시대에 발생했던 예언 문학의 다양성 ==== |
고대 근동 문학에서 나타는 예언들과 구약성서에 예언의 말씀을 남겼던 히브리 선지자의 활동 시기가 비슷하기에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구별할 수 있고, 각 예언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이다. | 고대 근동 문학에서 나타는 예언들과 구약성서에 예언의 말씀을 남겼던 히브리 선지자의 활동 시기가 비슷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공통점 및 차이점을 통해 각 예언의 특징을 비교분석하여 정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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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 연구에 있어 이 문헌이 중요한 이유 ==== | ==== 성서 연구에 있어 이 문헌이 중요한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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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고대 근동 문학에서 나타나는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중요했다. 왕의 비문 가운데 "선지자들의 메시지를가 언급되었고, 서기관들은 예언자들의 신탁을 인용하며 적합한 주장을 펼쳤다. 예언자들의 예언들은 왕의 서신, 제의적 문헌, 행정 문헌과 같은 문헌들에 전달되기도 했다. 이를 비추어 볼 때에 예언자들은 왕의 제의적 직무와 정치를 언급하며, 각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조나단 S. 그리어,존 W. 힐버,존 H. 월튼, 『고대 근동 문화와 구약의 배경』, CLC, (2020), 616p.)) | 성서와 고대 근동 문학에서 나타나는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중요했다. 왕의 비문 가운데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언급되었고, 서기관들은 예언자들의 신탁을 인용하며 적합한 주장을 펼쳤다. 예언자들의 예언들은 왕의 서신, 제의적 문헌, 행정 문헌과 같은 문헌들에 전달되기도 했다. 이를 비추어 볼 때에 예언자들은 왕의 제의적 직무와 정치를 언급하며, 각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조나단 S. 그리어,존 W. 힐버,존 H. 월튼, 『고대 근동 문화와 구약의 배경』, CLC, (2020), 616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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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고대 근동 문학의 예언자들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모두 다 상징적 예언의 행동을 하며 영감을 얻고 그 영감 속에서 신과 회의를 했음을 주장하며 이를 바탕으로 왕에게 훈계를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 바로 신관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성서의 예언자들은 유일신 사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선포했다. 반면에 고대 근동 문학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다른 신들을 반대하지 않고 다신론적 신관으로 여러 신을 대변한다. 또한 그들의 예언은 왕권을 뒷받침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는 특징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 볼 것이다. | 성서와 고대 근동 문학의 예언자들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모두 다 상징적 예언의 행동을 하며 영감을 얻고 그 영감 속에서 신과 회의를 했음을 주장하며 이를 바탕으로 왕에게 훈계를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 바로 신관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성서의 예언자들은 유일신 사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선포했다. 반면에 고대 근동 문학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다른 신들을 반대하지 않고 다신론적 신관으로 여러 신을 대변한다. 또한 그들의 예언은 왕권을 뒷받침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는 특징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 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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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근동 예언 문학의 특징 ==== | ==== 고대 근동 예언 문학의 특징 ==== |
메소포타미아의 선지자들은 왕정을 위해 일하는 왕정에 소속되어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국가의 번영과 영광이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예언에 중심적 기반은 왕정의 축복에 두었다. 아카드어 슐무(shulmu)는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같은 어근어로 알려져 신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통치하는 나라를 위한 번영의 상태를 말하며, 성경의 선포와 그 의미가 동일하다. | 메소포타미아의 선지자들은 왕궁에 소속되어 일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국가의 번영이며, 왕정의 축복에 중심을 둔 예언들이 많았다. 아카드어 슐무(shulmu)는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같은 어근어로 알려져 신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통치하는 나라를 위한 번영의 상태를 말하며, 성경의 선포와 그 의미가 동일하다. |
이러한 '복'의 의미가 짙은 고대 근동 문학의 예언 문학 중에서도, 신탁의 규모가 가장 큰 문헌은 신-앗수르 왕인 에살하돈(680-669)과 아슈르바니팔(668-627)이다. 크리스토퍼 B. 헤이즈, 『고대 근동 문헌과 구약성경』, CLC, (2018), 464p. | 이러한 '복'의 의미가 짙은 고대 근동 문학의 예언 문학 중에서도, 신탁의 규모가 가장 큰 문헌은 신-앗수르 왕인 에살하돈(680-669)과 아슈르바니팔(668-627)이다.(( 크리스토퍼 B. 헤이즈, 『고대 근동 문헌과 구약성경』, CLC, (2018), 464p.)) |
에살하돈과 아슈르바니팔은 특히 예언을 중시했고, 예언들을 보관한 앗수르 왕들이었다. 특히 에살하돈은 왕위계승의 복잡함을 그의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진 예언으로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앗수르)의 선지자들이 왕 중심의 예언 활동을 전개해나가며 왕권 이데올로기의 강화에 중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경식, 「훌다는 거짓 예언자인가?」, 『한국기독교신학논총』no.129, 한국기독교학회, 2023, 22p)) | 에살하돈과 아슈르바니팔은 특히 예언을 중시했고, 예언들을 보관한 앗수르 왕들이었다. 특히 에살하돈은 왕위계승의 복잡함을 그의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진 예언으로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앗수르)의 선지자들이 왕 중심의 예언 활동을 전개해나가며 왕권 이데올로기의 강화에 중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경식, 「훌다는 거짓 예언자인가?」, 『한국기독교신학논총』no.129, 한국기독교학회, 2023, 22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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