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이전 판이전 판다음 판 | 이전 판 |
2024고대근동문학:전쟁_보고문 [2024/05/13 02:47] – [성서 본문과의 유사성과 차이점] 211.178.206.128 | 2024고대근동문학:전쟁_보고문 [2024/05/20 11:59] (현재) – [2. 산헤립의 침공] kungsik |
---|
“오므리 왕조의 16 지역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도시로부터 X명의 포로를 잡았고, ...도시로부터 625명을 잡았다. 히나투나에서 X명의 포로를, 쿠?에서 650명의 포로를 잡았다. 야트비트에서 X명의 포로를 그리고 Sa...도시에서 656명을 포로로 잡았다.....마루마와 마룸도시에서... | “오므리 왕조의 16 지역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도시로부터 X명의 포로를 잡았고, ...도시로부터 625명을 잡았다. 히나투나에서 X명의 포로를, 쿠?에서 650명의 포로를 잡았다. 야트비트에서 X명의 포로를 그리고 Sa...도시에서 656명을 포로로 잡았다.....마루마와 마룸도시에서... |
| |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와 공신관계임을 면밀하게 보여주는 한편, 남유다는 앗수르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성경 구절이 열왕기하 16장 7~9절에서 나타난다. |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봉신 관계임을 면밀하게 보여주는 한편, 남유다는 앗수르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성경 구절이 열왕기하 16장 7~9절에서 나타난다. |
16:7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 16:7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
8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 8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
9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 9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
| |
아하스 왕은 앗수르왕에게 간청하며 아람과 북이스라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상황인데, 정황상 봉신관계라고 칭해도 무방할 정도로 굉장히 저자세로 앗수르왕을 높이는 모습을 보인다. 앗수르 입장에서는 유다가 봉신관계로 들어섰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만큼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고, 실제로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공격해 많은 이들을 죽이고 다메섹을 점령한다. |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에게 간청하며 아람과 북이스라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상황인데, 정황상 봉신관계라고 칭해도 무방할 정도로 굉장히 저자세로 앗수르 왕을 높이는 모습을 보인다. 앗수르 입장에서는 유다가 봉신관계로 들어섰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만큼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고, 실제로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공격해 많은 이들을 죽이고 다메섹을 점령한다. |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은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와 봉신관계라는 것이다. 봉신관계의 두 나라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에서 앗수르는 남유다의 간청을 들었고, 남유다를 지원한다. 개인적 사견으로는 남유다의 봉신관계가 된다면, 이집트를 견제할 수 있는 큰 이점이 있다. 또한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멸망시키고 통일 이스라엘이 된다면, 이집트와 연계해서 앗수르 서쪽 지역을 위협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앗수르는 이 전략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에 북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이집트와의 연합을 꾀하려다가 살만에셀5세 왕의 침략을 받고 멸망한 것을 보면 타당하게 느껴진다. |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은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와 봉신관계라는 것이다. 봉신관계의 두 나라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에서 앗수르는 남유다의 간청을 들었고, 남유다를 지원한다. 개인적 사견으로는 남유다의 봉신관계가 된다면, 이집트를 견제할 수 있는 큰 이점이 있다. 또한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멸망시키고 통일 이스라엘이 된다면, 이집트와 연계해서 앗수르 서쪽 지역을 위협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앗수르는 이 전략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에 북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살만에셀5세 왕의 침략을 받고 멸망한 것을 보면 타당하게 느껴진다. |
| |
이미 앗수르는 남유다의 봉신관계로 이해하고, 아하스 왕은 그에 걸맞은 세금을 납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다른 국면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 이유는 히스기야 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이미 앗수르는 남유다의 봉신관계로 이해하고, 아하스 왕은 그에 걸맞은 세금을 납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다른 국면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 이유는 히스기야 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왕하 18:14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 왕하 18:14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
| |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봉신관계를 잘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분노를 사게 되고 산헤립의 서부 군사 작전이 시작되는 계기로 보인다. (( 김영진, 앗수르 제국의 외교 정책과 이스라엘, 헤네메이아 투데이, 1999, pp 40-52)) |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봉신 관계를 잘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분노를 사게 되고 산헤립의 서부 군사 작전이 시작되는 계기로 보인다. (( 김영진, 앗수르 제국의 외교 정책과 이스라엘, 헤네메이아 투데이, 1999, pp 40-52)) |
사실 남유다 입장에선 애매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앗수르와 봉신관계였던,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대놓고 지켜봤던 남유다는 다음 차례가 본인들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에서 히스기야는 반 앗수르 정책을 펼치게 되었고, 친 이집트 정책을 꾀했다고 보여진다. | 사실 남유다 입장에선 애매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앗수르와 봉신 관계였던, 북이스라엘 멸망을 대놓고 지켜봤던 남유다는 다음 차례가 본인들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에서 히스기야는 반 앗수르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고 본다. |
==== 2. 산헤립의 침공 ==== | ==== 2. 산헤립의 침공 ==== |
| |
열왕기하 18:13~19:37, 이사야 36-37장과의 변행내용, 역대하 32장의 수정한 내용 모는 주전 701년 신-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크리스토퍼 B.헤이즈, 고대근동문학,2018, 423p)) | 열왕기하 18:13~19:37, 이사야 36-37장과의 변행내용, 역대하 32장의 수정한 내용 모는 주전 701년 신-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크리스토퍼 B.헤이즈, 고대근동문학,2018, 423p)) |
특히 구약학자 Brevard S. Childs는 열왕기하 18:13-16를 A부분 기사로 구분하고, B기사를 나머지 부분으로 살폈는데 (B기사 중에서 18장 17-19장 9a절, 36-37절을 B1으로 19장 9b-35절을 B2로 구분했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런 구분을 지지하고 있다. ((Brevard S. Childs, Isaiah and Assyian Crisis, 1967, 73-74)) A기사는 비교적 사실적 서술이 이루어지는데, 산헤립의 침공으로 인해 남유다의 영토가 뻇기고, 14절에서 히스기야는 자신의 죄임을 자청하며 성전의 금을 떼서 산헤립에게 바치게 되는 결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산헤립 서부 군사작전 비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반면, B기사는 야훼의 도움으로 산헤립을 무찌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비교적 A기사보다 역사적 사실로서 가치가 크다고 보기는 어렵게 보인다. ((김유기, 산헤립의 원정과 유다: 연대기의 관점, 구약논단, 2012, pp 139-140)) 하지만 확실하게 반역을 꾀하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은 속주로 만들고, 친이집트 정책과 주변 작은 나라들까지 영향을 끼친 남유다 히스기야를 산헤립은 왜 멸망시키지 않고, 돌아갔냐는 의문점이 든다. | 특히 구약학자 Brevard S. Childs는 열왕기하 18:13-16를 A부분 기사로 구분하고, B기사를 나머지 부분으로 살폈는데 (B기사 중에서 18:17-19:9a,36-37을 B1으로 19:9b-35을 B2로 구분했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런 구분을 지지하고 있다.) ((Brevard S. Childs, Isaiah and Assyian Crisis, 1967, 73-74)) A기사는 비교적 사실적 서술이 이루어지는데, 산헤립의 침공으로 인해 남유다의 영토가 뻇기고, 14절에서 히스기야는 자신의 죄임을 자청하며 성전의 금을 떼서 산헤립에게 바치게 되는 결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산헤립 서부 군사작전 비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반면, B기사는 야훼의 도움으로 산헤립을 무찌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비교적 A기사보다 역사적 사실로서 가치가 크다고 보기는 어렵게 보인다. ((김유기, 산헤립의 원정과 유다: 연대기의 관점, 구약논단, 2012, pp 139-140)) 하지만 확실하게 반역을 꾀하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은 속주로 만들고, 친이집트 정책과 주변 작은 나라들까지 영향을 끼친 남유다 히스기야를 산헤립은 왜 멸망시키지 않고, 돌아갔냐는 의문점이 든다. |
| |
서부 군사작전 문헌은 산헤립이 705년 왕위를 차지한 직후의 기사에 속한다. 고대 근동에서 심지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의 권력의 이양은 전형적으로 지배를 받는 국가에게 아마도 새로운 통지차가 이전 왕만큼 강한지 여부를 시험할 기회로 간주됐다. 산헤립이 고국과 다른 지역에서 자신의 통치를 견고히 하는데 비교적 시간이 들었던 거 같다. 701년 산헤립의 서부원정은 다시금 세금의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즉 “조공”(tribure)은 고대 제국이 자신의 봉신에게 요구한 지불에 부여된 명칭으로 마치 마피아의 보호 협박처럼 작용한다. ((ibid 423p)) | 서부 군사작전 문헌은 산헤립이 705년 왕위를 차지한 직후의 기사에 속한다. 고대 근동에서 심지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의 권력의 이양은 전형적으로 지배를 받는 국가에게 아마도 새로운 통지차가 이전 왕만큼 강한지 여부를 시험할 기회로 간주됐다. 산헤립이 고국과 다른 지역에서 자신의 통치를 견고히 하는데 비교적 시간이 들었던 거 같다. 701년 산헤립의 서부원정은 다시금 세금의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즉 “조공”(tribure)은 고대 제국이 자신의 봉신에게 요구한 지불에 부여된 명칭으로 마치 마피아의 보호 협박처럼 작용한다. ((크리스토퍼 B.헤이즈, 고대근동문학,2018, 423p)) |
즉, 히스기야는 앗수르왕의 이임과 더불어 세금에 대한 권리와 조공의 대한 불만을 앗수르에게 내비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701년 산헤립은 주변을 정리하고, 다시금 주변 국가로부터 봉신의 관계를 회복한 반면, 남유다와는 관계가 악화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반역자 시돈의왕 룰리도 왕이라고 표현해주는 반면, 히스기야는 유다 사람 히스기야라고 표현함으로써, 히스기야에 대한 적대감을 들어내고 있다. 이는 산헤립이 다른 주변 왕들보다 남유다와 히스기야를 신경쓰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 즉, 히스기야는 앗수르왕의 이임과 더불어 세금에 대한 권리와 조공의 대한 불만을 앗수르에게 내비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701년 산헤립은 주변을 정리하고, 다시금 주변 국가로부터 봉신의 관계를 회복한 반면, 남유다와는 관계가 악화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반역자 시돈의왕 룰리도 왕이라고 표현해주는 반면, 히스기야는 유다 사람 히스기야라고 표현함으로써, 히스기야에 대한 적대감을 들어내고 있다. 이는 산헤립이 다른 주변 왕들보다 남유다와 히스기야를 신경쓰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
| |
산헤립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 국가인 시돈을 점령한 후, 반란을 일으켰던 룰리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운다. 그러자 지중의 연안의 여러 나라들을 비롯해 요단 강 동편의 모압과 암몬까지 조공을 바치고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아슈켈론이 저항하자 산헤립은 손쉽게 아슈켈론을 점령한 후 이 도시의 지도자를 교체해 버린다. 에글론의 경우에는 고위 관리들과 귀족들이 주민들과 더불어 친 앗수르 성향의 파디 왕을 반 앗수르 성향을 지닌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넘겨준 후 앗수르에 저항했다. | 산헤립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 국가인 시돈을 점령한 후, 반란을 일으켰던 룰리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운다. 그러자 지중의 연안의 여러 나라들을 비롯해 요단 강 동편의 모압과 암몬까지 조공을 바치고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아슈켈론이 저항하자 산헤립은 손쉽게 아슈켈론을 점령한 후 이 도시의 지도자를 교체해 버린다. 에글론의 경우에는 고위 관리들과 귀족들이 주민들과 더불어 친 앗수르 성향의 파디 왕을 반 앗수르 성향을 지닌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넘겨준 후 앗수르에 저항했다. |
| |
자기네 힘으로 앗수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에글론은 이집트와 누비아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산헤립은 이집트- 누비아 군대의 공격을 맞써야 했다. 하지만 앗수르군은 손쉽게 정복했다. 에글론으로 진군한 앗수르 군대는 에글론의 반앗수르계 지도자들과 주민들을 처형하고 나머지 주민들을 전리품으로 빼았았다. 또한 예루살렘에 잡혀 있던 파디를 데려와 에글론 왕위에 복귀시켰다. 마지막으로 히스기야를 친 산헤립은 유다의 46개 도시를 점령한다. ((김유기, 산헤립의 원정과 유다: 연대기의 관점, 구약논단, 2012, pp 143-144)) | 자기네 힘으로 앗수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에글론은 이집트와 누비아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산헤립은 이집트- 누비아 군대의 공격을 맞써야 했다. 하지만 앗수르군은 손쉽게 정복했다. 에글론으로 진군한 앗수르 군대는 에글론의 반앗수르계 지도자들과 주민들을 처형하고 나머지 주민들을 전리품으로 빼았았다. 또한 예루살렘에 잡혀 있던 파디를 데려와 에글론 왕위에 복귀시켰다. 마지막으로 히스기야를 친 산헤립은 유다의 46개 도시를 점령한다. ((ibid 143~144)) |
===== 문헌에 언급되어 있는 인물에 관한 정보(이정석)===== | ===== 문헌에 언급되어 있는 인물에 관한 정보(이정석)===== |
| |
| |
| |
===== 성서 연구에 있어 이 문헌이 중요한 이유 ===== | ===== 성서 연구에 있어 이 문헌이 중요한 이유 (황시언)===== |
| |
| ===1. 성서와 다른 지역,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점=== |
| |
| 구약성서 열왕기하 18장에서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왕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친 내용은 이외 앗수르의 아슈르바니팔 서고에서 다른 형태로 발견된다. 성서는 보통 '사본'의 형태로 발견된 반면, 앗시리아에서 발견된 이 기록은 산헤립 프리즘이라는 새김글(inscription)의 형태로 발견된다.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다른 유형과 다른 지역에서 쓰였다는 점, 특히 본 사건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두 나라의 측면에서 쓰였다는 점은, 그것 자체로 역사적인 연구 가치를 소유한다.((https://app.alphalef.com/commentary/view/28/)). 더 나아가 같은 시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기에, 성서 연구에 있어 당대의 문서와 대조한다는 것은 성서의 신뢰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준다. 역사적 사실과 성서의 신뢰성 여부를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
| |
| ===2. 성서 문헌의 독특성과 역사적 사실의 비교=== |
| |
| 구약 성서 열왕기하 18-19장에서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전쟁 사건이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나, 성서 문헌의 독특한 점은 왕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전쟁 신학을 전개된다는 점이다. 현재 두 문헌 사이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히스기야가 이집트와 군사적 협력을 진행하여, 산헤립의 분노를 산 점, 둘째로는 산헤립이 두 번에 걸쳐 남유다를 공격하였으며, 히스기야의 막대한 뉘우침의 조공에도 무자비한 2차 침입을 한 점, 셋째로는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모욕하였고, 돌아와 아들에게 살해 당한 점이 그러하다. |
| |
| 여기서 발제 조는 '왜 산헤립은 반란국의 왕, 히스기야를 살려 두었는가?'라는 의문을 다시 되살린다. '왜 산헤립은 봉신 관계에서도 불성실하게 조공하며, 뒤에선 이집트와 동맹을 맺어 반란을 준비하던 히스기야를 왜 살려두었는가?' 질문은 '이 문헌이 성서 연구에 어떠한 영향까지 줄 수 있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이다. 전쟁 보고문에서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유다의 46개의 도시들을 점령하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막대한 재산을 빼앗아 금의환향 하는 가히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구약 성서에서는 야훼를 모욕한 대가로 185,000의 군사가 하루아침에 돌연사 하며, 자신도 패배자처럼 귀국하여, 아들들에게 죽는 수치스러운 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
| |
| 발제자는 이 두 문헌 사이의 특별히 산헤립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성서 연구에 있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성서에서는 산헤립의 죽음을 '아드람멜렉'과 '사라셀'이라는 두 아들들로부터 발생했다고 보며, 발견된 신-바빌론의 편지에 관한 논문 <THE MURDERER OF SENNACHERIB>에서 유력한 용의자와 산헤립에 대한 반란 조약에 대하여 등장한다. 바로 산헤립의 차남 아르다 물리시(Arda-Mulissi)가 음모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아르다 물리시는 왕세자인 장남이 포로가 되어 엘람으로 끌려감에 자신이 차기 왕이 됨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산헤립은 엘살하돈을 차기 왕세자로 공식적 선포를 하게 되고, 아르다 물리시는 빠르게 무력으로 왕이 되어야 했기에 아버지 산헤립을 살해했다는 주장이다((Simo Parpola. THE MURDERER OF SENNACHERIB. 1980)). |
| |
| 산헤립 죽음의 이유는 역사적 문헌에 있어서 정치적이었지만, 성서 문헌에 있어서는 신학적이었다. 구약 성서는 산헤립 죽음의 이유를 히스기야의 야훼에 대한 정직함과 하나님을 모욕한 대가로 묘사하고 있다. 산헤립의 죽음은 당대 사람들에게 충격적이며, 환영받는 소식이었다. 증오 받던 독재자가 신을 모욕한 행위로 인하여 신의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특히나 더욱 통쾌한 사실이었다((Simo Parpola. THE MURDERER OF SENNACHERIB. 1980)). 구약 성서는 그것을 하나님 중심의 전쟁 신학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 문헌의 독특성이 당대 고대 문헌과 비교함을 통해 오히려 더욱 드러나게 되는 것은, 고대 문헌 연구가 성서 연구에 공헌할 수 있는 바이다. |
===== 성서 본문과의 유사성과 차이점 ===== | ===== 성서 본문과의 유사성과 차이점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