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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고대근동문학:전쟁_보고문 [2024/05/13 06:51] – [성서 본문과의 유사성과 차이점] 58.140.208.194 | 2024고대근동문학:전쟁_보고문 [2024/05/20 11:59] (현재) – [2. 산헤립의 침공] kungs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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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8:13~19:37, 이사야 36-37장과의 변행내용, 역대하 32장의 수정한 내용 모는 주전 701년 신-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크리스토퍼 B.헤이즈, 고대근동문학,2018, 423p)) | 열왕기하 18:13~19:37, 이사야 36-37장과의 변행내용, 역대하 32장의 수정한 내용 모는 주전 701년 신-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크리스토퍼 B.헤이즈, 고대근동문학,2018, 423p)) |
특히 구약학자 Brevard S. Childs는 열왕기하 18:13-16를 A부분 기사로 구분하고, B기사를 나머지 부분으로 살폈는데 (B기사 중에서 18장 17-19장 9a절, 36-37절을 B1으로 19장 9b-35절을 B2로 구분했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런 구분을 지지하고 있다.) ((Brevard S. Childs, Isaiah and Assyian Crisis, 1967, 73-74)) A기사는 비교적 사실적 서술이 이루어지는데, 산헤립의 침공으로 인해 남유다의 영토가 뻇기고, 14절에서 히스기야는 자신의 죄임을 자청하며 성전의 금을 떼서 산헤립에게 바치게 되는 결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산헤립 서부 군사작전 비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반면, B기사는 야훼의 도움으로 산헤립을 무찌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비교적 A기사보다 역사적 사실로서 가치가 크다고 보기는 어렵게 보인다. ((김유기, 산헤립의 원정과 유다: 연대기의 관점, 구약논단, 2012, pp 139-140)) 하지만 확실하게 반역을 꾀하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은 속주로 만들고, 친이집트 정책과 주변 작은 나라들까지 영향을 끼친 남유다 히스기야를 산헤립은 왜 멸망시키지 않고, 돌아갔냐는 의문점이 든다. | 특히 구약학자 Brevard S. Childs는 열왕기하 18:13-16를 A부분 기사로 구분하고, B기사를 나머지 부분으로 살폈는데 (B기사 중에서 18:17-19:9a,36-37을 B1으로 19:9b-35을 B2로 구분했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런 구분을 지지하고 있다.) ((Brevard S. Childs, Isaiah and Assyian Crisis, 1967, 73-74)) A기사는 비교적 사실적 서술이 이루어지는데, 산헤립의 침공으로 인해 남유다의 영토가 뻇기고, 14절에서 히스기야는 자신의 죄임을 자청하며 성전의 금을 떼서 산헤립에게 바치게 되는 결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산헤립 서부 군사작전 비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반면, B기사는 야훼의 도움으로 산헤립을 무찌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비교적 A기사보다 역사적 사실로서 가치가 크다고 보기는 어렵게 보인다. ((김유기, 산헤립의 원정과 유다: 연대기의 관점, 구약논단, 2012, pp 139-140)) 하지만 확실하게 반역을 꾀하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은 속주로 만들고, 친이집트 정책과 주변 작은 나라들까지 영향을 끼친 남유다 히스기야를 산헤립은 왜 멸망시키지 않고, 돌아갔냐는 의문점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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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군사작전 문헌은 산헤립이 705년 왕위를 차지한 직후의 기사에 속한다. 고대 근동에서 심지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의 권력의 이양은 전형적으로 지배를 받는 국가에게 아마도 새로운 통지차가 이전 왕만큼 강한지 여부를 시험할 기회로 간주됐다. 산헤립이 고국과 다른 지역에서 자신의 통치를 견고히 하는데 비교적 시간이 들었던 거 같다. 701년 산헤립의 서부원정은 다시금 세금의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즉 “조공”(tribure)은 고대 제국이 자신의 봉신에게 요구한 지불에 부여된 명칭으로 마치 마피아의 보호 협박처럼 작용한다. ((크리스토퍼 B.헤이즈, 고대근동문학,2018, 423p)) | 서부 군사작전 문헌은 산헤립이 705년 왕위를 차지한 직후의 기사에 속한다. 고대 근동에서 심지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의 권력의 이양은 전형적으로 지배를 받는 국가에게 아마도 새로운 통지차가 이전 왕만큼 강한지 여부를 시험할 기회로 간주됐다. 산헤립이 고국과 다른 지역에서 자신의 통치를 견고히 하는데 비교적 시간이 들었던 거 같다. 701년 산헤립의 서부원정은 다시금 세금의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즉 “조공”(tribure)은 고대 제국이 자신의 봉신에게 요구한 지불에 부여된 명칭으로 마치 마피아의 보호 협박처럼 작용한다. ((크리스토퍼 B.헤이즈, 고대근동문학,2018, 423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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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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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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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이유로 히스기야가 앗수르에 대항하여 이집트와 군사적 동맹을 맺으려 했다는 점과 그것이 산헤립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점, 산헤립이 이집트의 지원군을 부수고, 히스기야의 뉘우침과 막대한 조공을 거둔 점, 그것이 모자랐는지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46개의 지역을 점령한 점, 마지막으로 귀환 후 아들에게 살해 당한 점이 성서 문헌과 고대 전쟁 보고문의 유사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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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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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서는 전쟁 보고문에 나오지 않은 185,000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과 패배자처럼 좌절하여 돌아가는 산헤립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죽음까지 이어진다. 구약 성서는 산헤립의 죽음의 앞뒤로 야훼 하나님의 손길을 묘사한다. 히스기야의 정직함을 받아, 하나님을 모욕하는 산헤립을 치는 이스라엘의 야훼이다. 가히 그것은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역대하 20:15)'을 보여주는 듯하다.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숨 막히게 포위했음에도, 남유다를 정복하지 못한 점과 히스기야를 살려둔 점, 막강한 왕 산헤립이 돌아가서 아들에게 죽은 점은 의문으로 남겨졌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해석한 것이다. 고대 문헌과 성서 문헌의 비교는 성서 문헌의 해석을 신학적으로 다양한 길을 열어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