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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톨레미 치하에서의 유대 ===== - 헬라 제국의 역대 왕들 (유다와 관련된 왕들) - 프톨레미 왕조 - 305–283 BC Ptolemy I Soter - 309–246 BC Ptolemy II Philadelphus - 246-222 BC Ptolemy III Euergetes - 221–204 BC Ptolemy IV Philopator - 204-180 BC Ptolemy V Epiphanes - 셀레우코스 왕조 - 305-281 BC Seleucus I Nicator - …. - 222-187 BC Antiochus III the Great - 187-175 BC Seleucus IV Philopator - 175-170 BC Antiochus (son of Seleucus IV) - 175-164 BC Antiochus IV Epiphanes - 164-161 BC Antiochus V Eupator - … - 헬라제국의 분열 - 다니엘 11:4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의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라 - 프톨레미 소테르의 유대 점령과 폭정 - 프톨레미 왕조의 창립자. 프톨레미 소테르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폭정을 저질렀음. 그는 특히 유대 종교를 억압하였고, 이집트로의 강제 이주 정책을 단행. 유대인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우고 여로 요새에 배치. 한편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과 도서관을 건축했고, 이 곳에 14,000명의 학생들과 학자들이 모여들 정도. 유클리드는 프톨레미의 궁정에서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함.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2권 1장. 톨레미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는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처럼 가장하여 예루살렘 에 들어온 후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을 점령하였다. 유대인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대항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지만 안식일은 안식과 심의 날이기 때문에 유대인 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톨레미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에 잔인한 방법으로 폭정을 휘둘러 댔다. 그런데 알렉산더의 후계 자들의 역사를 기록한 크니두스의 아가타르키데스(Agatharchides of Cnidus)는 우리가 미신을 믿는 바람에 자유를 상실하고 말았다면서 우리 민족을 혹평하고 있다: "예루살렘이라는 요새화된 대도시를 중 심으로 유대국이라는 한 나라가 있다. 이들은 얼토당토 않은 미신 때문에 무기를 들고 싸우기를 싫어하며 무서운 압제자인 톨레미의 손에 성을 고스란히 넘겨 주고 말았다.” 아가타르키데스는 우리 민족에 대해 이같이 혹평을 했다. 한편 톨레미는 유대 산지와 예루살렘과 사 마리아 인근 지방과 그리심 산 주변의 주민들을 애굽으로 포로로 잡아간 후에 그 곳에 강제로 정착시켰다. 톨레미는 예루살렘인들이 맹세와 약속은 철두철미하게 지킨다는 사실을 알렉산더가 다리우스를 격파한 후 이들에게 사신을 보냈을 때 한 답변을 통하여 확실히 깨닫고, 많은 예루살렘인들을 수비대에 배치시켰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들에게 마게도니아인들과 동등한 특권을 부여하였다. 더우기 톨레미는 자기의 후손들에게도 충성을 하겠다는 맹세를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유대인들 가운데는 애굽의 땅 이 비옥한 것과 톨레미의 성품이 관대한 것에 매혹되어 자발적으로 애굽에 온 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 유대인들은 선조들 때부터 내 려오는 삶의 방식을 보존하려는 문제에서 사마리아인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예루살렘 성전이 거룩하므로 예물 을 그리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의 성전으로 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맞섰기 때문이었다. - 프톨레미 필라델푸스의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와 토라의 번역 -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 위에 등대를 [건설](https://namu.wiki/w/%EC%95%8C%EB%A0%89%EC%82%B0%EB%93%9C%EB%A6%AC%EC%95%84%EC%9D%98%20%EB%93%B1%EB%8C%80). 학문에 더 큰 관심을 두었으며, 알렉산드리아에 동물원을 세워 자연과학 분야에 대한 학문을 발전시킴.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 요세푸스, 유대교대사, 12권 2장. 알렉산더가 12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죽고 다시 톨레미 소테르(Ptolemy Soter)가 40년간의 통치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자 필라델푸스(Philadelphus)가 애굽 왕국을 40년간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율법을 번역한 공을 남겼으며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끌려와 노예 생활을 하고 있던 자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이 때 해방된 자의 수는 120,000 명이었다. 그 자세한 경위는 아래와 같다: 왕의 도서관장(library - keep er)인 데메트리우스 팔레리우스(Demetrius Phalerius)는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책들, 특히 가치가 있고 왕의 기호에 맞는 책들 은 무엇이나 수집하려고 애를 썼다. 왕은 책을 수집하는데 큰 취미가 있었기에 데메트리우스는 왕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 였다. 한번은 톨레미가 데메트리우스에게 책을 몇 만 권이나 모았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데메트리우스는 이미 200,000권 이상의 책을 수집했 으며 얼마 안 있어 500,000권의 책을 소장하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이같이 말했다: "내 도서관에는 꼭 있어야 할 책들 가운 데 탐구해 볼 만한 유대인의 율법서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 책들은 유대인의 방언과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헬라어로 번역 하기에 매우 힘이 든다고 했소. 그 문자는 수리아의 고유 문자와 비슷 하며 발음도 비슷한 것처럼 보이나 나름대로 독특한 면이 있다고들 하 오. 그러나 우리가 그 책들을 번역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 책들이 우리 도서관에도 있으니 번역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다 갖추지 않았소?" 왕은 데메트리우스가 장서 수집에 남다른 열성을 보 였으므로 유대의 율법서를 번역하는 일도 맡아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따라서 데메트리우스는 유대 대제사장에게 서신을 보내 이런 사 정을 알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한편 왕의 가장 친한 친구 가운데는 겸손하기 때문에 특별히 왕이 가깝게 여기는 아리스테우스(Aristeus)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아리스테우스는 그전부터 왕에게 청원하여 모든 유대인 포로들을 석방 시켜 주어야겠다고 결심을 해오던 터에 이 때야말로 간청을 할 절 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먼저 왕의 호위 대장들 인 타렌툼의 소시비우스(Sosibius of Tarentum)와 안드레아스(Andreas)와 이야기를 하고 자기가 왕에게 간청할 때 뒤에서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쾌히 응락하였다. 따라서 아리스테우스는 그 들과 함께 왕 앞에 나아가 이같이 간청하였다: "오, 왕이시여! 무슨 일이든지 성급히 판단하거나 자신을 속이는 일은 옳지 못하며 항상 진 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율법서 를 복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번역하려고 하는 마당에 수많은 유대인 들을 이 나라의 노예로 그대로 남겨 놓고서야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겠읍니까? 왕의 나라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유대인들의 율 법서의 저자이심을 저는 특별한 연구를 통해 깨닫게 되었읍니다. 그 러니 이번 기회에 왕의 관대하심과 선하심을 과시하심이 어떻겠읍니 까? 그들을 현재의 비참한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 어떻겠읍 니까? 유대인들과 우리는 모두 만물의 조성자이신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읍니다. 우리는 그 분이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신 분이기 때문에 제나 (Zena, 혹은 생명, 혹은 주피터(Jupiter))라고 부 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대인들은 특별히 하나님께 멋진 제사를 드리는 민족이기 때문에 이 렇게만 하신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물론 오 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그들과 혈통이 같지도 않고 국적이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런 호의를 베풀자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하나님께서는 선 행을 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저 는 유대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라고 왕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 [[https://www.sefaria.org/Letter_of_Aristeas.4?lang=bi|아리스테아스의 편지]] - [[https://www.notion.so/b9cc7e2e2fca43df9ad7ce80279ef160?pvs=21|70인역]] - 프톨레미 유에르게테스 - 셀레우코스와 전쟁을 벌임. 그는 계속해서 순수과학을 발전시키려고 노력. - 프톨레미 필로파테르 - 셀레우코스 안티오쿠스 3세가 이집트에 선전포코를 하고 팔레스틴 지역에 침공.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안티오쿠스 3세를 패퇴시킴. - 프톨레미 4세는 승리를 축하하며 동부 지중해 연안 지방들을 순회.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성전에서 감사의 제사와 제물을 드림. 지성소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였음. 이에 앙심을 품고 이집트 내의 유대인들의 특권을 박탈하고 탄압. - 프톨레미 에피파네스 - 안티오쿠스 3세가 팔레스틴을 침공하고 유대인의 상당수가 그의 편에 가담. - 요단 계곡의 파네아스(Paneas)에서 안티오쿠스 3세의 군대가 이집트 군대를 패퇴시킴. 이집트까지 공격을 하려 하였으나 로마의 저지로 중단하고 기원전 198년에 평화협정 체결. - 이후 유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치하에 들어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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