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전쟁 보고문

문헌의 역사적 배경 (함형진)

1) 이스라엘과 앗수르 관계

앗수르는 고대근동사회에서 큰 영역을 지닌 국가이며, 제국의 형태로 통치를 했다. 제국의 통치는 우선 봉신국가와 속주를 나뉘게 되는데, 앗수르와 북이스라엘,남유다가 어떠한 형식으로 통치를 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제국을 잘 다스리기 위해선 평화적 방법이 필요하다. 앗수르도 제국의 통치 방식대로 평화적인 방법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제국의 통치를 거절하는 경우 군사적 행위를 진행하게 되는데, 그 결과물이 속주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바벨론 사람들의 성채를 앗수르에 병합하였다. 나는 [x]명의 관리를 그들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비크니 산(Mt. Bikni)까지의 모든 산 위에 있는 도시들의 지도자들에게서 조공을 받았다.” 1) 속주에 비록 앗수르 제국에서 총독이 파견된다고 하지만 이들의 외교권은 중앙 정부에 의하여 철저히 통제 받았다. 디글랏 빌레셀 3세의 Summary Inscription 3:10’-12’에 의하면 디글랏 빌레셋이 한 지역을 점령하여 속주로 만들고 그들에게 조공을 부과하는 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2)

열왕기하 15장 17~20절과 앗수르 기록을 보면 므나헴 통치기간 중 앗수르왕 불. 즉, 디글렛 빌레셋이 북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 유다 왕 아사랴 제삼십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 년간 다스리며
1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9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20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강탈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되돌아가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나는 쿠무흐(Kummu¬)의 쿠쉬타슈피(Kuštašpi), 다마스커스의 르신, 사마리아의 므나헴, 두로의 히람, 비블로스의 시비티-비일리(Sibitti-bi’li), 쿠에의 우리키(Urikki), 갈게메스의 피시리스(Pisiris), 하맛의 인일(I’nil), 삼알의 파나 (Panammu), 구루굼(Gurgum)의 타르훌랄라(Tar¬ulara), 밀리타네의 술루말....조공(mandattu)을 받았다.....” 

또한 열왕기하 15장 29절과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연대기 기록을 비교하면 북이스라엘과 앗수르제국은 봉신관계임을 정확히 드러내고 있다.

15: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오므리 왕조의 16 지역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도시로부터 X명의 포로를 잡았고, ...도시로부터 625명을 잡았다. 히나투나에서 X명의 포로를, 쿠?에서 650명의 포로를 잡았다. 야트비트에서 X명의 포로를 그리고 Sa...도시에서 656명을 포로로 잡았다.....마루마와 마룸도시에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봉신 관계임을 면밀하게 보여주는 한편, 남유다는 앗수르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성경 구절이 열왕기하 16장 7~9절에서 나타난다.

16:7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8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9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에게 간청하며 아람과 북이스라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상황인데, 정황상 봉신관계라고 칭해도 무방할 정도로 굉장히 저자세로 앗수르 왕을 높이는 모습을 보인다. 앗수르 입장에서는 유다가 봉신관계로 들어섰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만큼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고, 실제로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공격해 많은 이들을 죽이고 다메섹을 점령한다.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은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와 봉신관계라는 것이다. 봉신관계의 두 나라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에서 앗수르는 남유다의 간청을 들었고, 남유다를 지원한다. 개인적 사견으로는 남유다의 봉신관계가 된다면, 이집트를 견제할 수 있는 큰 이점이 있다. 또한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멸망시키고 통일 이스라엘이 된다면, 이집트와 연계해서 앗수르 서쪽 지역을 위협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앗수르는 이 전략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에 북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살만에셀5세 왕의 침략을 받고 멸망한 것을 보면 타당하게 느껴진다.

이미 앗수르는 남유다의 봉신관계로 이해하고, 아하스 왕은 그에 걸맞은 세금을 납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다른 국면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 이유는 히스기야 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왕하 18:14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봉신 관계를 잘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분노를 사게 되고 산헤립의 서부 군사 작전이 시작되는 계기로 보인다. 3) 사실 남유다 입장에선 애매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앗수르와 봉신 관계였던, 북이스라엘 멸망을 대놓고 지켜봤던 남유다는 다음 차례가 본인들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에서 히스기야는 반 앗수르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고 본다.

2. 산헤립의 침공

열왕기하 18:13~19:37, 이사야 36-37장과의 변행내용, 역대하 32장의 수정한 내용 모는 주전 701년 신-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4) 특히 구약학자 Brevard S. Childs는 열왕기하 18:13-16를 A부분 기사로 구분하고, B기사를 나머지 부분으로 살폈는데 (B기사 중에서 18:17-19:9a,36-37을 B1으로 19:9b-35을 B2로 구분했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런 구분을 지지하고 있다.) 5) A기사는 비교적 사실적 서술이 이루어지는데, 산헤립의 침공으로 인해 남유다의 영토가 뻇기고, 14절에서 히스기야는 자신의 죄임을 자청하며 성전의 금을 떼서 산헤립에게 바치게 되는 결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산헤립 서부 군사작전 비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반면, B기사는 야훼의 도움으로 산헤립을 무찌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비교적 A기사보다 역사적 사실로서 가치가 크다고 보기는 어렵게 보인다. 6) 하지만 확실하게 반역을 꾀하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은 속주로 만들고, 친이집트 정책과 주변 작은 나라들까지 영향을 끼친 남유다 히스기야를 산헤립은 왜 멸망시키지 않고, 돌아갔냐는 의문점이 든다.

서부 군사작전 문헌은 산헤립이 705년 왕위를 차지한 직후의 기사에 속한다. 고대 근동에서 심지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의 권력의 이양은 전형적으로 지배를 받는 국가에게 아마도 새로운 통지차가 이전 왕만큼 강한지 여부를 시험할 기회로 간주됐다. 산헤립이 고국과 다른 지역에서 자신의 통치를 견고히 하는데 비교적 시간이 들었던 거 같다. 701년 산헤립의 서부원정은 다시금 세금의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즉 “조공”(tribure)은 고대 제국이 자신의 봉신에게 요구한 지불에 부여된 명칭으로 마치 마피아의 보호 협박처럼 작용한다. 7) 즉, 히스기야는 앗수르왕의 이임과 더불어 세금에 대한 권리와 조공의 대한 불만을 앗수르에게 내비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701년 산헤립은 주변을 정리하고, 다시금 주변 국가로부터 봉신의 관계를 회복한 반면, 남유다와는 관계가 악화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반역자 시돈의왕 룰리도 왕이라고 표현해주는 반면, 히스기야는 유다 사람 히스기야라고 표현함으로써, 히스기야에 대한 적대감을 들어내고 있다. 이는 산헤립이 다른 주변 왕들보다 남유다와 히스기야를 신경쓰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문헌 내용 요약 (함형진)

산헤립의 701년 서부 군사 작전

문헌 종류 : 길이 26.35cm에 직경 11.11cm의 통 모양으로 된 진흙 원기둥 위에 기록된 설형 문자 문헌; 수십 개의 사본이 존재한다.

시기: 700년

장소: 니느웨

언어: 아카드어

번역: 모드르카이 코건 8)

A. 서문

나의 세 번째 군사 작전에서 나는 하티까지 행진했다. (하티는 앗수르 서부지역을 일컫는 말.) 9)

B. 룰리

시돈의 왕 룰리는 나의 주권의 광채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바다 한가운데 먼곳으로 달아나 영원히 사라졌다. 큰 시돈 작은 시돈, 비트 지티, 사리프투, 마하리바, 우슈, 아크지브, 악코, 수비대를 위한 음식과 물이 제공되는 벽을 갖춘 성을 압도하여 나의 발 아래 엎드렸다. 나는 그들을 다스리도록 투발루를 그들 위에 왕 위에 앉혔다. 그에게 나의 위엄과 대한 조공을 매년 쉬지 않고 부과했다.

C. 아무루의 왕들

삼시무루나의 미누힘무, 시돈의 투발루, 아르바드의 압딜리티, 비블로스의 우루밀키, 아쉬도드의 미틴티, 벳-암몬의 푸두일루 모압의 그모스-나드비, 에돔의 아야람무, 이들은 내게 청중 선물로 사치스러운 선물을 네 배나 내 앞에 가져와 나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D. 시드카

그러나 나의 멍에에 복종하지 않는 아스글론의 왕 시드카 그의 가족 신들 그 자신 그의 아내 그의 아들들, 그의 딸들 , 그의 형제들, 그의 후손에 대해 나는 추방하여 그를 앗수르로 끌고 갔다. 예전 그들의 왕이었던 루키브티의 아들 샤루-루 다리를 세워 아스글론 사람들을 다스리게 했다. 나의 위엄에 대한 조공과 선물을 바치게 했고, 그는 나의 멍에를 끌고 있다. 나는 군사 원정길에 시드카의 도시들 중 나의 발 앞에 바로 무릎 꿇지 않은 벳-다곤, 욥바, 베네-베라크, 아솔을 포위 정복했으며 그들의 전리품을 가져갔다.

E. 에글론 사람들

앗수르에게 맹세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자기네 왕 파디를 철 족쇄로 결박한 채로 팽개쳐 둔 채로 유다의 히스기야에게 적대적인 방식으로 넘겨주었던 에글론의 신하들, 귀족들, 백성들이 그들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겁에 질렸다. 이집트의 왕들 구스왕의 궁수들, 잔차부대, 기병대가 수 많은 세력을 모아 그들을 도우러 왔다. 엘테케의 평원에서 나의 앞에 전선이 형성되었다. 나는 아슈르를 신뢰하고 그들과 싸워 이겼다. 이집트 전차 부대와 군주들과 구스 사람들의 전차부대를 전투 가운데 생포했다. 나는 엘드게와 딤나를 포위하여 정복했고, 그들의 전리품을 챙겼다. 나는 에그론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킨 그곳 신하들과 귀족들을 죽였으며, 그들의 시체를 성읍 주변 망대에 매달았다. 죄와 과오를 저지른 도시 주민들은 전리품으로 삼았다. 그들 중 무죄인 사람들은 풀어주었다. 그들의 왕 파디는 예루살렘 한가운데서 끌어내 그들 위에 주권의 자리에 앉히고 나의 지배에 대한 조공을 그에게 부과했다.

F. 히스기야

나의 멍에에 복종하지 않은 유다인 히스기야에 관해 말하자면, 그의 강력한 46개 도시와 요새 및 그 주변의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도시를 상대로 경사로를 쌓게 하고 패쇄기를 보병을 투입했다. 부수는 도구와 자르는 도구와 포위 공격 기구들을 사용하여 200,150명의 크고 작은 남녀 백성, 말들, 노새들, 나귀들 낙타들 소 떼와 양 떼를 셀 수 없이 많이 그들 가운데서 끌어내 전리품으로 삼았다. 그를 새장의 새처럼 예루살렘 가운데 가두었다. 내가 약탈했던 그의 성읍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 아스돗의 왕 미틴니, 에그론의 왕 바디, 가자의 왕 실리벨에게 주었고 유다의 땅을 축소시켰다. 히스기야는 내 지배권의 놀라운 탁월함에 압도되었으며 내가 나의 서읍 니느웨로 떠난 후에 그는 그의 정예부대와 그의 최상의 군인들을 내게 보냈는데 그 부대와 군인들은 그가 자신의 딸들과 왕궁 여자들과 노래 부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30달란트의 금과 800달란트의 은, 최상의 안티몬, 큰 덩어리의 홍옥수, 상아로 만든 의자, 코끼리 가죽, 상아, 흑단 나무, 회양목, 다채로운 옷 세모포 옷, 자주색과 정자색으로 염색한 양모, 구리와 철과 청동의 용기, 주석, 철,전차, 포위를 위한 방패, 창, 갑옷, 허리띠에 달린 단검, 활과 화살, 수 많은 전쟁 장식구와 기구들로 자신의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을 강화하려고 중원 부대를 데려왔었다. 그는 조공을 전달하고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기 전령을 급파했다. 10) 11)

내용정리

산헤립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 국가인 시돈을 점령한 후, 반란을 일으켰던 룰리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운다. 그러자 지중의 연안의 여러 나라들을 비롯해 요단 강 동편의 모압과 암몬까지 조공을 바치고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아슈켈론이 저항하자 산헤립은 손쉽게 아슈켈론을 점령한 후 이 도시의 지도자를 교체해 버린다. 에글론의 경우에는 고위 관리들과 귀족들이 주민들과 더불어 친 앗수르 성향의 파디 왕을 반 앗수르 성향을 지닌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넘겨준 후 앗수르에 저항했다.

자기네 힘으로 앗수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에글론은 이집트와 누비아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산헤립은 이집트- 누비아 군대의 공격을 맞써야 했다. 하지만 앗수르군은 손쉽게 정복했다. 에글론으로 진군한 앗수르 군대는 에글론의 반앗수르계 지도자들과 주민들을 처형하고 나머지 주민들을 전리품으로 빼았았다. 또한 예루살렘에 잡혀 있던 파디를 데려와 에글론 왕위에 복귀시켰다. 마지막으로 히스기야를 친 산헤립은 유다의 46개 도시를 점령한다. 12)

문헌에 언급되어 있는 인물에 관한 정보(이정석)

1) 산헤립[ Sennacherib ](B.C. 705-681년)

산헤립 왕은 앗수르의 왕으로 사르곤 2세(Sargon Ⅱ)의 아들이며, 에살핫돈(Esarhaddon)의 아버지이다. 니느웨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으며, 즉위 직후 제국 전역에 발생했던 반란을 평정했는데, 바벨론의 므로닥발라단을 멸망시켰고(B.C. 702년), 반(反) 앗수르 정책을 표방하는 팔레스타인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히스기야 14년에 유다를 침공하여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취했다.

이에 히스기야는 화해의 공물을 바치기 위해 성전 내의 모든 보화를 내주어야 했다(왕하 18:13-16). 얼마 후 산헤립은 랍사게를 보내 다시 선전포고를 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히스기야는 절망하여 성전에서 기도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유다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날 밤 하나님에 의해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몰살당했고(왕하 19:35) 산헤립은 자기 나라로 퇴각했으나(대하 32:21; 사 37:36-37) 왕위 계승자로 에살핫돈을 지명한 데 대해 앙심을 품은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며, 에살핫돈이 반란을 평정하고 즉위하였다(왕하 19:37).13)

2)히스기야[ Hezekiah ](B.C. 728-687년)

히스기야는 '여호와는 강하시다’는 뜻으로 남유다의 제13대 왕이다. 북이스라엘의 패망과 앗수르의 남하 정책에 맞서야 하는 위기 정국을 신앙으로 헤쳐 나간 3대 현군(여호사밧, 요시야 등) 중 한 사람이다(왕하 18-20장; 대하 29-32장; 사 36-39장). 초기 13년 동안 부친 아하스와 함께 통치하다가 부친의 무능력으로 실권을 장악한 뒤 부친이 폐쇄하고 더럽혔던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고 성전 문을 다시 열고 여호와 예배를 회복시켰다. 이사야, 미가 선지자와 함께 백성의 영적 각성 운동을 벌이는 등 구약 시대 가장 신실한 통치자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히스기야 재위 6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가 드디어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였고, 사르곤 2세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뒤 주민들을 메소보다미아 일대로 추방시켰다. 그후 앗수르 왕 산헤립은 남유다를 침공하여 히스기야는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갖 수모를 감내해야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수르 군사는 하룻밤에 185,000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퇴각하였다(왕하 18-19장). 그후 히스기야는 등창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사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시켜 주셨다(왕하 20:1-11). 이때 그의 아들 므낫세가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히스기야 사후 부왕의 왕권을 이어받았다(왕하 20:20-21). 히스기야가 회복되자 바벨론 왕 므로닥 발라단은 히스기야를 축하하기 위하여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실제로는 히스기야를 설득하여 앗수르 세력에 대항할 비밀 동맹을 맺으려는 의도였다. 주의가 산만한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에게 그의 모든 보고(寶庫)를 보여 주었는데, 이는 장차 바벨론에 의한 유다 왕국의 멸망을 암시하는 행위로 여겨져 히스기야는 큰 책망을 받았다(왕하 20:12-19). 하지만 히스기야는 평생 바른 신앙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나라를 바르게 통치한 성군으로 평가된다.14)

3)룰리[Luli](B.C. 729-694년)

Luli 또는 Elulaios는 페니키아 도시 티레의 왕이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두로는 남은 권력을 아시리아 에게 잃었다. 티레는 아시리아의 속국이었지만 룰리는 여러 번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724년부터 720년까지 두로는 포위 공격을 받았고, 살만에셀 은 항구를 봉쇄했다 . 사르곤 통치 기간 동안 아시리아인들은 키프로스를 점령했지만 , 705년 사르곤이 죽자 룰리는 그 섬과 키티 온(Kition) 식민지를 되찾았다. 701년 또 다른 반란이 있은 후 산헤립은 룰리를 키티온으로 피신하도록 강요했고, 티레는 시돈 과 아코 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 하고, 도시 자체와 해외 식민지로 전락했다. 룰리가 죽은 후 티레 왕국은 일련의 친앗시리아 군주와 총독들에 의해 통치되었다.15)

4)아슈르

아슈르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이다. 본래 기원전 3000년 중반부터 고대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아수르가 신격화되며 형성된 신으로, 이후 아시리아의 수호신인 동시에 최고신이 되었다. 바빌로니아의 마르둑과 동등한 신격을 지녔다.16)

성서 연구에 있어 이 문헌이 중요한 이유 (황시언)

1. 성서와 다른 지역,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점

구약성서 열왕기하 18장에서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왕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친 내용은 이외 앗수르의 아슈르바니팔 서고에서 다른 형태로 발견된다. 성서는 보통 '사본'의 형태로 발견된 반면, 앗시리아에서 발견된 이 기록은 산헤립 프리즘이라는 새김글(inscription)의 형태로 발견된다.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다른 유형과 다른 지역에서 쓰였다는 점, 특히 본 사건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두 나라의 측면에서 쓰였다는 점은, 그것 자체로 역사적인 연구 가치를 소유한다.17). 더 나아가 같은 시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기에, 성서 연구에 있어 당대의 문서와 대조한다는 것은 성서의 신뢰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준다. 역사적 사실과 성서의 신뢰성 여부를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2. 성서 문헌의 독특성과 역사적 사실의 비교

구약 성서 열왕기하 18-19장에서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전쟁 사건이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나, 성서 문헌의 독특한 점은 왕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전쟁 신학을 전개된다는 점이다. 현재 두 문헌 사이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히스기야가 이집트와 군사적 협력을 진행하여, 산헤립의 분노를 산 점, 둘째로는 산헤립이 두 번에 걸쳐 남유다를 공격하였으며, 히스기야의 막대한 뉘우침의 조공에도 무자비한 2차 침입을 한 점, 셋째로는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모욕하였고, 돌아와 아들에게 살해 당한 점이 그러하다.

여기서 발제 조는 '왜 산헤립은 반란국의 왕, 히스기야를 살려 두었는가?'라는 의문을 다시 되살린다. '왜 산헤립은 봉신 관계에서도 불성실하게 조공하며, 뒤에선 이집트와 동맹을 맺어 반란을 준비하던 히스기야를 왜 살려두었는가?' 질문은 '이 문헌이 성서 연구에 어떠한 영향까지 줄 수 있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이다. 전쟁 보고문에서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유다의 46개의 도시들을 점령하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막대한 재산을 빼앗아 금의환향 하는 가히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구약 성서에서는 야훼를 모욕한 대가로 185,000의 군사가 하루아침에 돌연사 하며, 자신도 패배자처럼 귀국하여, 아들들에게 죽는 수치스러운 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발제자는 이 두 문헌 사이의 특별히 산헤립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성서 연구에 있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성서에서는 산헤립의 죽음을 '아드람멜렉'과 '사라셀'이라는 두 아들들로부터 발생했다고 보며, 발견된 신-바빌론의 편지에 관한 논문 <THE MURDERER OF SENNACHERIB>에서 유력한 용의자와 산헤립에 대한 반란 조약에 대하여 등장한다. 바로 산헤립의 차남 아르다 물리시(Arda-Mulissi)가 음모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아르다 물리시는 왕세자인 장남이 포로가 되어 엘람으로 끌려감에 자신이 차기 왕이 됨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산헤립은 엘살하돈을 차기 왕세자로 공식적 선포를 하게 되고, 아르다 물리시는 빠르게 무력으로 왕이 되어야 했기에 아버지 산헤립을 살해했다는 주장이다18).

산헤립 죽음의 이유는 역사적 문헌에 있어서 정치적이었지만, 성서 문헌에 있어서는 신학적이었다. 구약 성서는 산헤립 죽음의 이유를 히스기야의 야훼에 대한 정직함과 하나님을 모욕한 대가로 묘사하고 있다. 산헤립의 죽음은 당대 사람들에게 충격적이며, 환영받는 소식이었다. 증오 받던 독재자가 신을 모욕한 행위로 인하여 신의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특히나 더욱 통쾌한 사실이었다19). 구약 성서는 그것을 하나님 중심의 전쟁 신학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 문헌의 독특성이 당대 고대 문헌과 비교함을 통해 오히려 더욱 드러나게 되는 것은, 고대 문헌 연구가 성서 연구에 공헌할 수 있는 바이다.

성서 본문과의 유사성과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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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과의 유사성 및 차이점

1)
H. Tadmor, The Inscriptions of Tiglath-pileser III King of Assyria, Jerusalem, 1994, pp. 132-133
3)
김영진, 앗수르 제국의 외교 정책과 이스라엘, 헤네메이아 투데이, 1999, pp 40-52
4) , 7)
크리스토퍼 B.헤이즈, 고대근동문학,2018, 423p
5)
Brevard S. Childs, Isaiah and Assyian Crisis, 1967, 73-74
6)
김유기, 산헤립의 원정과 유다: 연대기의 관점, 구약논단, 2012, pp 139-140
8) , 9)
ibid 420p
10)
ibid 420~423p
11)
김유기, 산헤립의 원정과 유다: 연대기의 관점, 구약논단, 2012, pp 141-143
12)
ibid 143~144
18) , 19)
Simo Parpola. THE MURDERER OF SENNACHERIB.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