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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일에 관한 규정 (16장 1-34절)
본문의 구조 (발제자: 김영우)
본문의 흐름을 간략하게 기록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본문의 구조나 순서가 어떠한 원리로 배열되어 있다고 생각하는지?
[ 본문의 전체적인 구조 ]
레위기 16장에는 속죄일 의식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이 내용은 크게 의식의 개요, 세부적인 지침, 요약과 같은 구조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1) 본문은 속죄일에 관한 명령으로 시작된다. 초반 개요에서는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어떤 의복과 제물을 갖춰야 하는지 지시된다. 그 후에는 의식의 세부적인 지침이 제시된다. 제사는 제사장을 위한 속죄와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로 구분하여 진행된다. 그 후 아사셀 염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속죄일을 영원히 지킬 것과 그 날짜가 지시된다. 그리고 속죄일 규례에 대한 요약이 이뤄진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해당 구조는 마크 루거와 고든 웬함의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2)3)
1. 속죄일에 관한 명령 (16:1-10)
(1) 대제사장의 임의적인 지성소 출입 규제 (16:1-2)
(2) 속죄일 의식에 필요한 의복과 제물 (16:3-5)
(3) 속죄제와 아사셀 염소 규례(속죄일 의식 개요) (16:6-10)
2. 의식의 세부적인 지침 (16:11-28)
(1) 지성소 안에서 이뤄지는 대제사장과 제사장 가문을 위한 속죄 (16:11-14)
(2) 지성소 안에서 이뤄지는 지성소와 회막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속죄 (16:15-19)
(3) 아사셀 염소에 대한 세부 규례 (16:20-22)
(4) 아론의 정결의식 (16:23-24a)
(5) 아론과 백성을 위한 번제 (16:24b-25)
(6) 속죄일 의식 후 후속조치 (16:26-28)
3. 백성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규례 (16:29-34)
(1) 속죄일의 일시와 백성이 취할 태도 (16:29-31)
(2) 속죄일 요약 (16:32-34)
본문의 청중 (발제자: 김영우)
본문의 청중은 누구인가. 다르게 이야기 하면 이것은 어느 시기에 기술 된 것인가. 오늘 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로 나뉘고 있다.
1. 전통적 견해
전통적으로 교회는 레위기가 모세에 의하여 기록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모세에게서 기원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본문이 내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등장한다.(대표적인 예로는 레위기 1:1; 16:2이 있다.) 둘째. 본문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대적 정황이 그러하다. 본문에는 “회막”에서 드리는 제사, 광야로 보내는 “아사셀”, “진영”과 같은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본문이 광야시대의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4)
2. 비평적 견해
근대 이후 성경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 전개 되면서 오경의 모세 저작에 대한 의심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후 시대적인 영향을 받은 학자 그룹은 모세오경이 모세의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서의 결합물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모세를 레위기 저자로 보기 어렵다는 그러한 입장은 오늘에까지도 이르고 있다.5)
오경이 다양한 문서의 결합물이라고 주장하는 진영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벨하우젠이다. 그에 따르면 오경은 네 개의 자료에 기초한다.6) 이러한 견해 위에서 레위기는 “P”자료로 불린다. 이는 그 기원이 제사장(Priest) 자료라는 의미이다. 물론 레위기 전체가 P 자료인가(P에 그 기원을 두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이 그룹 안에서도 논란이 있다. 노트의 경우에는 레위기 중 8-10장만이 P에, 보다 엄밀히는 9장만이 본래 P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7)
P자료는 언제 생성되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는 포로기 이후 저작설(후기 연대설)이다. 벨하우젠 등 후기 연대설을 지지하는 입장은 의식이 정교화되고 발전되어간다는 생각 위에 서있다. 그러한 까닭에 그들이 볼 때 정교한 의식을 다룬 P문서는 전기 문서가 될 수 없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제사란 본래 고도로 의식화 된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16장 2절 등에서 보이듯 제사는 본래 어디서든 드릴 수 있었고, 사사기 13장 16절에서 보이듯 제사는 식탁의 교제였다. 제사는 장소나 형식에 있어 유연했다. 그러나 그러던 것이 요시야 왕 이후 엄격해지면서 변화를 겪게 되었고 그러한 실존, 또는 관성이 후에 P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8)
P에 대한 두 번째 의견은 포로기 이전 저작설이다. 이는 P가 모세시대에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포로기 이전에 등장하였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카우프만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견해는 본래 19세기, 벨하우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훨씬 지지 받는 생각이었다. 카우프만과 그 학파는 몇 가지 이유로 P가 후기에 저작되었다는 주장을 반대했다. 그러한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근거들이 있었다. 첫째. 시대나 의식이 고정되는 것은 이미 초기 문명의 축제에서 많이 나타난다. 둘째. P자료에 나타나는 언어는 포로기 시기 언어나 용어와 거리가 있다. 셋째. 신명기, 여호수아 등에는 레위기가 언급되나 그 역의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P가 신명기보다 앞섬을 의미한다.9) 이러한 이유로 카우프만 등은 포로기 이후 레위기가 쓰였다는 주장을 반대했다.
3. 종합적 결론
비평학의 도래 이후 레위기의 저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본고는 전통적인 저작설, 하나님께로부터 모세에게 계시가 주어져 선포, 또는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여러 증거를 검토해 볼 때에 더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선 본문이 포로기보다 앞서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웬함이 지적한 것과 같이 소위 P자료와 포로기 이후의 어휘가 유사하지 않다. 늦은 저작으로 볼 이유가 없다.10) 둘째. 정교한 의식은 이미 이른 시기, 심지어 모세 이전 시기에도 고대 근동에서 발견된다.11) 셋째. 포로기에 기술 된 에스겔서에서는 레위기를 언급한다.(예를 들어 에스겔서 22장 26절은 레위기 10장 10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의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12) 벨하우젠은 에스겔서가 레위기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성경 본문 내적으로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13) 넷째. 후기 저작설의 이론적, 실제적 근거가 없다. 후기 저작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적 철학에 입각하여 무언가가 계속 고등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종교도 그렇게 발전했을 것이므로 복잡한 제의는 마지막에 등장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가 그렇게 발달했을 것이라는 주장, 다신교에서 시간을 지나 유일신교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14) 그리하여 포로기 시대 이후 후기 저작설은 배격된다.
다음으로 본문이 모세시대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근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전통적 견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뤄졌지만 본문은 모세가 해당 본문의 내용을 받았음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본문 내적으로 보면 모세와 본문의 기원은 떼어놓을 수 없다. 둘째. 본문이 말하는 배경은 후대의 정착 상황이나 포로기 정황과는 거리가 멀다.
레위기 뿐 아니라 모세오경이 오래 된 글이요, 뿐만 아니라 모세에게 기원을 두고 있는 글이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확고한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성경 곳곳에서 드러난다. 우선 모세오경 자체에 모세와 오경의 기원을 연결하는 표현, 또는 모세가 기록에 관여했다는 사실(예컨대 출애굽기 24장 4절)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또 역대기, 느헤미야 등 포로기 이후 문서에도 모세와 율법을 연결하는 언급이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도 오경을 모세와 연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15)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교회사에서도 오래간 부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본문은 이러한 모든 정황을 고려하여 레위기 또는 본문 16장을 모세의 저작으로 보고 이 성경이 1차적으로는 시내산(출애굽기 19장 1절 참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것이라고 결론짓는 바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 (발제자: 박상현)
1. 당시(출애굽 광야 공동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연관성
본 발제조는 본문과 청중을 출애굽 광야 공동체로 특정하였다. 속죄일에 대한 언급은 전선지서나 후선지서에서 찾아 볼 수 없고, 오경에서 세 번 언급된다.
- 레 23:27-32; 속죄일에 대한 규정
- 민 29:7 ; 속죄일에 대한 간략한 예전적 조례들
- 레 25:9 ; 안식일의 일정표가 속죄일에 시작된다.16)
모세 오경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수여하신 계명으로 본 발제조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모세 오경의 내적 통일성을 의미한다. 또한 웬함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레 16:2)“이라는 구절이 모세의 특별한 위상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며 이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를 관통하는 관점이라고 말한다.17)
벨하우젠 학파는 속죄일에 대한 역사적 언급의 결여를 근거로 속죄일의 기원을 포로기 이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속죄일 준수의 고대성을 지지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 고대의 의식이 현재의 본문의 토대가 된다.
- 아사셀 염소의 방출 의례는 고대의 의식의 징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의식과 병행을 이루는 초기의 방출 의례가 우가릿과 히타이트 문헌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 아사셀(아자젤)이란 단어의 역사성 역시 고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 속죄소에서 중요했던 피 의례의 기능이다. 이는 초기의 시대로부터 기원한 것이 분명하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기 이전 시대에서 속죄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는 속죄일이 왕국 시대에 커다란 국가적 중요성을 갖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또한 이 날은 아하스와 같은 사악한 왕들의 통치기에 폐지되어 제2성전 시대까지 회복되지 않았을 가능 성이 높다. 따라서 속죄일 준수는 왕국 시대에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포로기 이후 시대에 관심을 끌게 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속죄일은 후대의 제2성전 시대에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아졌다. 죄로 인해 포로기를 겪은 이스라엘은 이 날을 준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대속되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제2성전의 파괴와 희생제의 종료와 더불어 이 속죄일은 유대교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19)
본문의 배경은 10장을 재현하고 있는데(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후에) 이는 속죄일 규정이 주어진 것이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주어진 것을 의미하며20), 본문의 마지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주어진 율법에 순종했다는 기록 역시 당시의 역사성을 입증한다.(히브리어 원문에는 “그가 행했다”라고 되어 있지만 주석의 저자는 행위의 주체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하였다)21)
2. 속죄일 의식의 의미
본문은 속죄일에 행해야 할 것을 규정한다. 본문은 앞선 장인 11~15장, 특히 부정함이 성소를 더럽힌다는 15장 31절의 내용을 전제로 한다. 속죄일의 희생 제사는 이 오염에서 성소를 정화한다. 또한 성막의 정결은 백성의 정화와 연관되므로 속죄일 의식에서 치러지는 대제사장과 회중의 속죄는 필수적이다. 레위기 16장은 레위 기의 중심 부분이자 앞선 열 다섯 장의 정점이며, 이어지는 장의 명령들을 수행하기 위한 영적 동기를 제공한다.22)
대제사장은 1년 중 단 하루 이 날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성소 역시 속죄의 장소였으며,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서, 백성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23) 속죄일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반역으로 말미암은 죄가 속죄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반역으로 번역된 ‘페샤’는 구약에서 죄를 일컫는 가장 심한 단어이며 극악한 죄, 계약 위반을 의미했다. 이는 속죄일에 고의로 저지른 죄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성막이 정화되었음을 의미한다.24) 백성은 속죄일에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일을 삼가야 했으며 진영과 성소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씻어야 했다.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과 민족 전체를 위해 번제를 드리고 제단에서 속죄 제물의 기름을 불살랐다.25)
속죄일 의식 율법이 가진 이론상의 목적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인 아론이 성막에 들어갔을 때 즉사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이는 사람이 아무리 거룩할지라도 적절한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26)
피 뿌림 의식은 속죄제로 묘사된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에서 성막의 다양한 부분을 정결하게 한다고 진술된다. 피는 정결함과 성결함의 수단이다. 이스라엘의 죄와 부정은 백성이 예배하는 건물로 이전된다.27)
속죄일 의식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특징은 염소 한 마리를 광야로 보내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백성에게서 떠나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지성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은 일반 백성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의식은 모든 백성이 지켜보았다. 이는 죄의 실재와 죄의 제거의 필요성을 예증한 강력한 가시적 도구였다.28)
본문분석 - 의식의 세부적인 지침(16:11-28) [발제자 : 이주복, 황현철]
1. 속죄일에 대한 명령(1-10절)
- 임의적으로 지성소의 출입을 금지함(1-2절)
- 속죄일 의식에 필요한 제물과 의복(3-6절)
- 속죄제와 아사셀 염소 규례(7-10절)
(1) 임의적으로 지성소의 출입을 금지함(16:1-2) 1-2절은 속죄일에 대한 율법을 확고하게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 속에 둔다. 바로 10장에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려 죽임 당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는 16장의 지침 목적 중 하나로 대제사장이 그의 두 아들이 경험했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성막이 세워지기 전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에게 나타나셨다. 이제 하나님은 성소 가장 깊은 곳에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 지나치게 친숙하면 오히려 가볍게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율법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나타나신 첫 번째 경우에서처럼 영속적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실 때 큰 경외심을 요구한다.29) 성막의 이곳이 “지성소”라 불린 이유는 그곳에 속죄 덮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용된 명사 ‘카포레트’는 어근 ‘카파르’에서 나왔는데, 이는 ‘카포레트’가 속죄의 장소였음을 나타낸다. 이 덮개는 그것이 단순히 궤를 덮었기 때문이 아니라, 속죄의 장소로 기능하기 때문에 중요했다. 속죄 덮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였고,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시는 현장이었다.30)
(2) 성소에 들어오려면? 속죄일 의식에 필요한 제물과 의복(16:3-6) 속죄일 의식에 앞서 미리 준비되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먼저 대제사장을 위한 속죄 제물로 수송아지를 바치고 번제물로 숫양을 바쳤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 자기 몸을 씻고 모두 세마포로 이루어진 평소보다는 더 간단하고 덜 화려한 옷을 입어야 했다. 평소 대제사장의 옷은 다른 제사장들과는 구분된 보다 화려한 옷을 입었고 이는 마치 대제사장을 왕처럼 만들었다. 이는 분명 대제사장은 위대한 중보자로서 다른 제사장들보다 독보적으로 보였을 것이다.(레8:6-9) 그러나 단촐한 속죄일의 의복은 그를 종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아무리 대제사장이라고 하여도 모든 존귀함이 제거되는 것과 그가 가진 실제 지위를 보여준다.31) 그 다음으로 대제사장은 회중의 속죄제를 위해 숫염소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번제로 바쳐야 했다. 백성을 위한 이 제물들은 속죄일에 회중이 바쳐 제사장에게 주어야 했다.
(3) 속죄제와 아사셀 염소 규례(16:7-10) 이어서 대제사장은 두 염소를 위해 제비를 뽑은데, 하나는 여호와를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속죄의 염소”를 위한 것이었다. 여호와를 위해 뽑힌 염소는 속죄 제물로 바쳐졌고, 다른 염소는 광야로 보내졌다. “속죄의 염소”라는 단어 해석과 관련해서는 폭넓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아자젤’은 전적인 제거를 의미하는 추상 명사로 이해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이 단어의 첫 부분이 어근 ‘아자즈’(강하다, 맹렬하다)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염소가 도착하는 지역의 환경을 묘사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미들을 종합해 봤을 때 염소를 놓아주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다시는 그들에게 돌아올 수 없도록 제거되었음을 보여준다.
2. 지성소 안에서 이뤄지는 대제사장과 제사장 가문을 위한 속죄 (16:11-14)
11b-14절은 11a절과 관련된 세부 사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론은 자신과 제사장 가문을 위하여 수송아지를 잡은 후에 여호와 앞에서 분향을 한다. 성소로 들어갈 때 아론은 향단에서 취한 불을 더해서 그 연기가 아론으로 하여금 ‘캅포레트’(כַּפֹּרֶת : “속죄 덮개”) 위에 임재하는 여호와를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의 생명을 보호하게 한다.32)
이처럼 ‘향연’으로 증거궤 위 ‘캅포레트’를 가리는 이유를 가리켜 그 발판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33) 또한, 향연을 연관시키는 본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하틀리는 여호와를 향한 분향의 효력은 민수기 16:43-50에 언급된 고라의 반역 사건과 본문의 내용을 연결한다.34)
이 사건에서 여호와의 진노는 고라와 그의 가족들을 항해 촉발되었으며 온 회중에게 임하는 듯했으나 아론은 급히 향로를 취해 거기에 제단에서 가져온 불을 놓고 그 불 위에 향을 피웠다. 이어서 그는 재빨리 백성들을 위한 대속을 시행하려고 회중 안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분향과 향기라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뜻을 함의하며,35) 이는 마치 노아의 제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노아의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36) 이는 예언서에도 전제되어 있는 내용으로써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데 목적을 두며, 레위기 16장에서 언급되는 ‘향연’은 이러한 이해가 담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든 웬함과 이환진은 이를 시내 산 현현 사건의 제의적 재현이라고 주장하며, 향연을 피워 죽음을 피하는 대제사장의 모습을 출애굽기 19장과 연결짓는데, 여호와의 임재와 그 앞에서 자신을 감추는 대제사장이라는 속죄일의 독특한 맥락에서 볼 때 이들의 견해 또한, 타당해 보인다.37) 이와 같은 분향의 과정을 마친 후에 아론은 카포레트 앞에 수소의 피를 손가락으로 일곱 번 뿌려야 했는데 그 이유는 7은 완전 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성소에 피를 가져가 뿌리는 것은 속죄일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며 오직 속죄일에만 지성소에 피를 가져가는 것은 속죄일의 엄숙함을 강조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38)
3. 지성소 안에서 이뤄지는 지성소와 회막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속죄 (16:15-19)
다음으로, 대제사장은 모든 백성을 위하여 숫염소를 잡고 똑같이 피를 캅포레트 앞에 일곱 번 뿌린다. 앞선 피 뿌리기 의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악행으로 인해 지성소까지 침입한 ‘부정함’(טֻּמְאֹת֙ : 툼므오트)으로부터 그곳을 정화시킨다. 이러한 의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역 행위’(פִּשְׁעֵיהֶ֖ם : 피슈에헴)와 ‘죄’(חַטֹּאתָ֑ם : 하토탐)로부터 지성소를 정결하게 만들었다. 이 지점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레위기에서 처음으로 ‘부정함의 개념(툼므오트)’와 ‘죄’(하타트)가 한 구절에 함께 나오는 첫 본문이기 때문이다.39)
이러한 용어들의 선택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 있어서는 하틀리의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틀리는 이 표현에 대해서 백성들이 우연히 또는 무지 가운데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범죄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반역 행위’(פֶּשַׁע : 페샤)라는 용어는 의도적으로 여호와의 법을 위반했던 행위들을 지시하며, 명사형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패역”이라는 뜻을 갖는다. 두 번째 단어 하타트는 중대성과는 상관없이 일반적인 죄들을 지시한다. 이 두 단어가 전치사 ‘미’(מִ : “~로부터”) 및 ‘레’(לְ : “~까지”)와 함께 쓰이는 용법은 공공연한 행동으로부터 우연히 저지른 어떤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범죄 행위들이 이 의식에 의해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취된 대속은 전체 백성을 위한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40)
18절의 “제단”은 바깥 제단이다.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란 표현은 8장 15절의 표현을 상기시키며, 이 의식이 제단을 다시 바치기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대제사장이 피를 뿌림으로써 제단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레위기에서 8:15과 16:19에만 등장하는 표현이다.41) 그렇다면, 어떠한 신학적인 의도가 여기에 숨어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도는 속죄일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 있는데, 8:11, 15와 16:18-19의 구조를 비교하며 속죄일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해석하는 키우치의 견해가 앞선 필자의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견해로 보인다.
키우치에 의하면, 8장과 16장은 번제단을 정화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의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의식 사이에는 순서의 역전이 발생한다. 우선, 8장에서 언급되는 제사장의 위임식에서는 번제단에 기름을 뿌린 후에(8:11) 수송아지의 피를 뿌린다(8:15). 그러나 16장에서는 먼저 피를 바른 후에 피를 뿌린다.42) 그러므로, 이와 같은 순서의 역전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속죄’가 재생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16;18-19에서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한 속죄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깨끗함과 거룩함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깨끗함과 거룩함을 함축하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요구할 것이다. 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그 가운데 있는 성막의 관계는 <백성의 죄> → <성막 오염> → <성막의 정화와 거룩함> → <백성의 정화와 거룩함과 그에 상응하는 삶의 요청>이라는 일종의 순환 관계라고 할 수 있고, 완전한 속죄는 지성소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43)
4. 아사셀 염소에 대한 세부 규례 (16:20-22)
아사셀의 의미는 난제이며 대표적으로 네 가지 견해로 나뉜다. 첫째, “아사셀”을 염소로 묘사하는 단어로 보는 관점으로써 이 해석은 “떠나는 염소”로 해석된다. 둘째, 아사셀을 “전적인 제거”를 의미하는 추상단어로 간주하는 개념으로써 이 의식 전체를 영적인 실제들의 상징적인 구현으로 바라보는 견해이다. 셋째는 랍비 전승에서 온 것으로 아사셀을 염소가 떠나는 장소로 해석하는 견해로써 그 장소를 바위 절벽 즉 가장 위험한 산지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아사셀을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여 광야에 거주하는 마귀 혹은 사탄으로 보는 견해이다.44)
각각의 견해는 장, 단점을 지니며 아사셀이라는 단어의 문법적인 분석을 통해 보완되지만, 이 중에는 아사셀을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는 마지막 입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충열과 하계상은 이 입장을 지지하여 아사셀을 위하여 염소를 광야로 보내는 의식이 죄의 선동자이자 여호와의 대적자로 간주되는 아사셀에게 모든 죄가 돌아가는 것이라고 해석한다.45)
그러나, 아사셀을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는 입장은 치명적인 단점을 갖는데, 그 단점은 이 주장을 고스란히 따를 경우 레위기의 규정이 악마나 귀신, 타락한 천사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규정한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아사셀을 위한 제의는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거행되던 관습이며, 우가릿 문헌에서 아사셀은 아세라의 아들이자 아침 별인 “아타르”의 직함인 “에쩨쯔엘”에서 파생된 용어로 보는 견해가 있다.46) 여기에 더하여 신구약 중간기 문헌들이라 여겨지는 에녹서, 이사야 27장과 같은 본문에서는 타락한 천사나 리워야단과 같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세력들이 언급된다.47) 그렇다면, 아사셀을 위한 염소 의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구조 속에서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의식이 성소의 정화와 관련되는가?
대다수의 학자는 아사셀 염소 의식이 자체적으로 독립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가 속죄일 의식에 편입되었다고 추정하며, 이런 관점을 취하지 않는 다른 주해학자는 이 두 의식 사이의 관계 문제에 답하지 않은 채 그냥 두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키우치는 이 의례가 아사셀을 처벌하기 위한 의식을 포함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보내는 염소를 봄으로써 자신들의 모든 자기 숨김이 드러나고 그것이 성소로부터 제거된다는 것을 의식적인 의미에서 확정한다고 해석한다.48)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유일신 신앙에서 아사셀의 존재로 인해 발생하는 의문에 대하여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일신 신앙과 아사셀의 존재를 추측하게 만드는 개념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감은 해소될 수 없는 것일까?
이러한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한 왕대일의 견해는 탁월해 보인다. 왕대일은 아사셀이라는 존재와 이와 관련된 의식이 이스라엘의 유일신 야웨 신앙의 빛에서 철저히 비신성화 된 것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광야란 죄와 악이 머무는 곳이라는 인식을 차용함과 동시에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관습을 유일신 신앙의 바탕에서 상징적으로 재구성하여 죄와 악이 머무는 광야를 거룩한 성소와 대비되는 부정한 공간으로만 보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아사셀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신앙 구조 속에서 여호와의 대적자가 될 수 없다.49)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초기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와 비교해 볼 때 구약에서의 사탄의 활동이 분명하게 기술되지 않은 이유는, 사탄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경 계시의 초기 단계에서 하나님을 공공연하게 부인하는 문화 속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님의 유일성과 주권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라는 보이드의 주장은 왕대일의 입장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50)
결과적으로 이러한 신학적인 작업을 통해 이스라엘은 공동체의 죄가 끼친 오염으로부터 성소를 정결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속죄일 의식을 거행하게 된다. 그리고 백성들의 참회가 동반되는 과정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끼친 죄에 대한 죄책감과 부담감으로부터 이스라엘 공동체가 상징적으로 벗어나는 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5. 아론의 정결의식 (16:23-24a)
대제사장 아론은 속죄일 의례를 마친 후에 세마포 옷을 벗고, 물로 자기 몸을 씻고, 더 화려한 의복을 입는다. 아론이 목욕 후에 거룩한 세마포 옷에서 자신의 일상적인 옷으로 갈아입는 것에 대해서는 하틀리의 “거룩함의 제거”로 해석하지만,51) 키우치의 “부정함의 정화”가 더 나은 견해로 보인다. 방금까지 가장 거룩한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론은 어떠한 이유에서 부정하게 되었는가? 오염의 근거는 가장 높은 수준의 거룩함으로부터 더 낮은 수준의 거룩함으로 이동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52)
거룩함의 이동은 곧 자기를 숨기는 것, 부정하게 되는 것과 관련이 되는데 구약의 본문에서 스스로를 숨기는 것(‘하타트’)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죄’로 간주되며 곧 부정한 것의 정화와 관련이 된다.53)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더 낮은 거룩으로 이동하는 아론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숨기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부정해지며 이를 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씻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나실인이 자신의 서원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을 때 속죄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으며(민 6:14), 이환진 또한, 키우치와 같은 견해를 보이기 때문에 이 견해는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54)
6. 아론과 백성을 위한 번제 (16:24b-25)
이어서 아론은 자신과 백성을 위해서 두 번의 번제를 드리는데 먼저는 자신을 위해서 그다음은 백성들을 위해서 드린다. 이는 아론을 포함한 백성 전체의 헌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7. 속죄일 의식 후 후속 조치 (16:26-28)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자를 위한 정화 의식이 행해진다. 키우치는 이 의식이 죄와 죄책에 접촉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앞서 아론이 더 낮은 차원의 거룩함으로 이동하여 발생한 부정함을 정화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라고 주장하지만, 여기에서는 이 주장이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55) 왜냐하면, 회중들의 죄들을 짊어진 짐승은 거룩한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룩함과의 접촉으로 인한 정결이라는 키우치의 견해는 이 대목에서는 맞지 않으며, 27절의 속죄제 수송아지와 염소의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르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이 정화 의식이 차별성을 갖는 것은 4:12과 달리 고기를 불사르는 사람이 오염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차별성은 앞서 대제사장이 피를 뿌림으로써 제단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속죄일의 독특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4장의 의식도 그 자체로 효력이 있지만, 속죄일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더 정화는 더 강력한 의미를 함의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일 것이다.
8. 백성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규례(29-34절)
이전까지는 대제사장과 그를 돕는 자들이 해야할 것들에 집중되었다. 이제 16장의 마지막 부분은 백성이 속죄일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속죄일의 시기와 백성의 태도(16:29-31) 속죄일은 일곱째 달 열째 날에 지켜야 했으며, 영원한 규례로 정해졌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괴롭게 하며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금식과 연계된다. 따라서 이날은 모세 율법에 있는 유일한 금식일이다. 이 날에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던 모든 타국인이나 거류민들도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2)속죄일에 대한 요약(16:32-34) 속죄일에 행해야 할 일들의 상세한 설명 후 본문은 앞으로 치를 주요 일들을 요약한다. 제사장은 속죄일에 세마포 옷만 입어야 한다는 점을 되새겼다. 이어서 본문은 속죄일에 속죄 되어야 할 대상 다섯을 거룩함의 순서에 따라 지성소, 회막, 제단, 제사장들, 백성으로 나열한다.56)
본문의 적용 (발제자: 박상현)
속죄일 제사가 다른 제사와 의미적으로 혹은 해석적으로 구별되는 내용을 언급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속죄일은 신약의 저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히브리서 기자에게 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구약 의식의 궁극적 불충분성을 강조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모형이었다. 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물 희생제사는 여러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상응한다. 이 특별한 날에 휘장 뒤로 들어갈 수 있는 이는 오 직 대제사장뿐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모형이었던 성막의 원형인 천상의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셨으며.(히 9:23~24) 자신의 피를 속죄제물 삼아 지성소로 단번에 들어가셨다.(히 9:12) 라우바흐는 ‘그리스도의 피’가 신약의 사상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하며 이 의미는 특별히 속죄일 희생 제물에서 이끌어 낸 것이라고 주장한다.57)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고 있던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 오직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는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찢긴 것에 상응하고, 이를 통해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 나아갈 수 있었던 하나님의 존전에 모두가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58)
속죄일의 한계는 내러티브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이 법규가 매년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 역시 자신을 위해 제물을 바쳐야 했다는 사실도 강조된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제물로 자기 자신을 단번에 드리신, 죄 없는 대제사장이셨다.(히 10:10), 59)
아사셀 염소를 진영 밖으로 보내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성취된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진영 밖으로 보내지셨고,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가셨다(히 13:12). 신약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사셀 염소의 원형으로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상응성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분(고후 5:21)”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분(갈 3:13)”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분(요일 3:5)”로 언급하는 것은 아사셀 염소를 암시하는 것으로 제안된다. 벤-샴마이는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이 아사셀 염소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이 이사야 53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은 아사셀 염소를 모형론적 의미로 보는 것의 근거가 된다.60)
그리스도를 ‘힐라스테리온(화목제물)’으로 지칭하는 것 역시 모형론적 의미를 갖는다.61)
속죄일에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를 괴롭게 해야 했고,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는 개인의 통회가 죄사함에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기 원하는 자는 반드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자기 죄를 인정하며, 그 죄를 끊어내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타국인이나 거류민도 이날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거류민에게도 역시 여호와께 순종할 것이 요구되었으며 이는 신약에서 이방인 회심의 근거가 된다.62)
속죄일 제사가 다른 제사와 의미적으로 혹은 해석적으로 구별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 일년 중 속죄일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속죄 덮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자,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시는 현장이었다. 이날 대제사장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취하실 일의 맛보기였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히 4:14~16 ; 10:19~22)63)
-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평소 수행할 때 입었던 옷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세마포 옷을 입었다. 이는 속죄를 구하는 대제사장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낸다.64)
-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드린 후, 피운 불과 향을 휘장 안으로 가져갔다. 또 수소의 피를 손가락으로 시은좌 앞에 일곱 번 뿌려야 했다. 지성소에 피를 가져가 뿌리는 것은 속죄일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다. 이는 속죄일의 독보적 엄숙함을 강조한다. 시은좌는 궤를 덮고 있는데 궤 안에는 십계명, 만나,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었고 , 이 물품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을 강조한다. 따라서 시은좌 위의 피는 이스라엘의 죄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속죄되었음을 나타낸다.65)
- 백성을 위한 속죄제가 드려진 후에는 성막 내부의 여러 물품이 정화되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반역으로 말미암은 죄가 속죄되었다. 속죄일에는 고의로 저지른 죄가 속죄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성막이 정화되는 날이었다.66)
- 다음으로 번제단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 아론은 제단 위에 피를 일곱 번 뿌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정결하게 했다. 젠슨은 정화 절차에 주목하며 가장 거룩한 물건(시은좌)으로부터 - 회막과 마지막으로 번제단이 정화되었다.67)
- 다음으로 아론은 살아 있는 염소에게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의 죄악과 반역을 참회했다. 이어서 염소는 광야로 보내졌다. 속죄일의 또 독특한 특징이 여기에서 발견되는데, 희생 제사 동물에게 한 손을 얹은 이전의 기록들(1:4; 3:2,8,13; 4:4,24,29,33)과는 달리, 대제사장은 동물에게 두 손을 얹는다. 조하르는 한 손에서 두 손으로 강화되는 것은 고의적인 죄들이 이전되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제사자가 아닌 대제사장이 동물에게 손을 얹는다. 아론은 민족 대표로서 전체 민족을 위해 중재하고, 죄는 가장 철저한 방식으로 다뤄질 것이다.68)
- 아사셀 염소는 속죄의 결과, 죄책의 제거를 묘사한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성취된다. 본문에서 염소가 불의를 “짊어지는 것”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단어 ‘나싸’는 이사야 53장 4절과 12절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69)
- 속죄일에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를 부정해야 했고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전통적으로 이 명령은 금식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모세 율법에 있는 유일한 금식일이다. 이는 통회가 죄사함에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를 낮추고, 죄를 인정하며 죄를 끊어내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모든 타국인도 이날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는 거류민에게도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순종할 것이 기대되었음을 의미하며 신약에서 이방인들의 회심을 예시한다.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