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의 예언

고대 근동의 신탁 활동

신탁(divination)이란 신의 뜻을 알고자 하는 행위이다. 왜 사람들은 신의 뜻을 궁금해 했을까? 신의 뜻을 묻는 것은 중대한 의사 결정을 위한 근거를 얻는 것이었다. 의사 결정에는 다양한 판단 요소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현대 만큼 과학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 시대에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정보량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또한 가뭄이나 홍수 등,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는 자연재해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를 언제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이를 신에게 묻고자 하였다.

또다른 한편으로 당시 정치 체제는 종교에 상당 부분 의존하였다. 왕의 권력 기반은 왕은 신에게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라는 정치, 종교 이해에 근거하고 있었다.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의 권위를 가진 존재임을 드러내야 했고, 왕이 결정하는 일들은 신의 뜻이어야만 했다. 따라서 왕들은 자신들이 신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존재임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고대 근동의 예언자들은 특히 왕궁을 중심으로 활동 하곤 하였다.

이렇게 신의 뜻을 묻는 행위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점성술이나, 강신술, 해몽, 그리고 천체 관측 등의 행위를 통해 신의 뜻을 알고자 하였다. 즉, 고대인들은 꿈이나 하늘, 주변 사물의 모습 가운데 신의 뜻이 '암호화' 되어 있다고 여겼다. 이 암호를 풀 수 있는 지혜는 오직 신의 부름을 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었고, 이들 당시의 예언자 내지 점술사 등으로 불리었다.

고대 근동에는 다양한 형태의 신탁 행위가 이루어졌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는 일찍이 천문학이 발달하였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농사와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하늘에서 나타나는 신의 계시나 징조를 읽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혜성과 같이 특별한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이를 유의미한 징조로 여기곤 했다.

upload.wikimedia.org_wikipedia_commons_thumb_3_38_babylonian_tablet_recording_halley_27s_comet.jpg_640px-babylonian_tablet_recording_halley_27s_comet.jpg 핼리혜성 관측을 기록하고 있는 바벨론 문헌

그리고 또다른 특별한 방식의 점술로는 '내장점'이 있었다. 동물의 내장, 특히 간을 갈라서 그 안에 나오는 모양 패턴(아마도 쐐기 문자와 비슷하게 보였을 것)들을 통해 그 안에서 메시지를 찾아 내려는 방식이다.

간 모양의 점술 도구

그리고 에스더서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부르(pur)와 같이 주사위 모양의 점술 도구를 이용했던 흔적도 나타난다.

i0.wp.com_www.minimannamoments.com_wp-content_uploads_2019_03_persian-pur-dice-esther-pur.jpg

그리고 성서의 예언 형태와 유사한 형태의 신탁 행위로는 강신술이나 엑스타시 상태에 들어가 신의 뜻을 '듣고 말하는' 행위 또한 주요한 신탁 행위였는데, 이러한 신탁 행위를 통해 얻은 신의 뜻을 기록한 예언 문학들은 신앗수르 시대의 에살핫돈 왕과 아수르바니팔 시대에 활발하게 기록되었다.

성서의 예언

성서 역시 예언자들의 예언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택한 예언자들을 통해 전해 주시는 '직접 계시' 외의 다른 점술행위나 신탁행위는 금기시 되고 있다. 그런데 '꿈 해몽'이나 '우림과 둠밈'과 같이 제한되고 검증된 신탁 행위는 일부 인정 되기도 한다.

eyaldavidson.co.il_wp-content_uploads_2021_11_d7_90_d7_95_d7_a8_d7_99_d7_9d-1.jpg 우림과 둠밈 신탁 상상도

에스겔 21:21-23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어귀에 서서 점을 치되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서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설치하며 입을 벌리고 죽이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설치하고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게 되었나니 전에 그들에게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거짓 점괘로 여길 것이나 바벨론 왕은 그 죄악을 기억하고 그 무리를 잡으리라

열왕기상 18:28-29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예레미야 14: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성서의 예언 전통에 따르면 예언은 철저히 검증되어야 한다. 열왕기상 13장과 예레미야 28장 등을 참고하면 참된 예언의 조건들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예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선포되어야 한다.
2) 예언은 하나님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3) 예언은 다른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해서는 안된다.
4) 예언은 하나님으로부터로만 임해야 한다.
5) 평화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나, 심판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다.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심)

우리가 주목해볼 만한 것은 마지막 조건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의 중요한 본질이 있다. 예언의 핵심은 미래의 일을 아는 것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살피는데에 있다.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이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언은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위 영상 참고).

예언의 시대에서 말씀(율법)의 시대로의 전환

성서에서 예언의 시대는 유다의 멸망과 함께 저물어 간다. 느헤미야서에서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로 치부된다. 이는 토라의 형성과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포로기 이후 토라가 집대성됨으로 하나님의 뜻은 토라를 중심으로 고정된다. 이를 벗어나 검증될 수 없는 예언은 거짓 예언으로 인식된다. 이제 하나님의 뜻은 다른 통로가 아니라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