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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

연도 이스라엘 앗시리아 바벨론
기원전 800년 - 아다드-니라리 III 재위 시작 (기원전 810년) -
기원전 750년 - 디글랏빌레셀 III 재위 시작 (기원전 745년) -
기원전 740년 북왕국 이스라엘에 아람-이스라엘 전쟁 - -
기원전 730년 호세아 왕이 이집트에 협력 (기원전 732년) - -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 함락, 북왕국 이스라엘 멸망 (기원전 722년) 샬만에셀 V, 사마리아 공략 -
기원전 700년 701년 산헤립의 유다 침공 (히스기야 왕) 산해립 재위 (기원전 705년-681년) -
기원전 690년 - - -
기원전 680년 - 에살하돈 재위 (기원전 681년-669년) -
기원전 670년 - - -
기원전 660년 - 아슈르바니팔 재위 (기원전 668년) -
기원전 650년 - - -
기원전 640년 요시야 왕이 개혁을 주도 (기원전 639년) - 나보폴라사르가 바벨론 왕국 창립 (기원전 626년)
기원전 630년 - - -
기원전 620년 - - 나보폴라사르 재위 하에 바벨론의 강화
기원전 610년 - 아슈르 우발리트 II, (기원전 609년) 나보폴라사르-바벨론 부흥
기원전 600년 1차 포로 여호야긴 (가원전 597) 갈그미스 전투 / 앗수르 멸 (기원전 605년) 느부갓네살 II 재위 시작 (기원전 605년)
기원전 590년 2차 포로 및 예루살렘 멸망. 시드기야 (기원전 587) - 느부갓네살 II, 예루살렘 포위 (기원전 587년)
기원전 560년 포로기 - - 나보니두스 (556-539)
기원전 540년 포로지에서 귀환 (538) - -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 멸망 (539)

문헌의 역사적 배경 (용시온)

1. 신-앗수르의 고대 근동 세계 지역 정복

(본 자료의 연도는 모두 주전(B.C.)이며 인물(왕)과 관련된 연도는 재위기간임.)

744 디글랏빌레셀 3세, 앗수르의 구조적 변혁을 시작함
722 살만에셀 5세, 사르곤 2세 사마리아 정복
689 산헤립, 바빌론 침공
671 에살핫돈,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 정복
664 아슈르바니팔, 이집트의 수도 테베 정복 
652 바빌론의 사무스-숨-우킨의 반란
626 바빌론의 독립왕조
612 메디아와 바빌론에 의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함락

1)

745년부터 612년의 앗수르는 고대 근동 전체에 군사적 영향력을 끼쳤다. 이 시기의 앗수르는 진정한 제국으로서 더 많은 영토를 통치 아래 통합시켰으며 서부 이란에서 지중해 지역까지, 남부 아나톨리아로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한 세기 동안 디글랏빌레셀 3세(745-727), 살만에셀 5세(727-722), 사르곤 2세(722-705), 산헤립(705-681), 에살핫돈(681-669), 아슈르바니팔(668-627)과 같은 통치자들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없이 거대한 제국을 다스렸다. 산헤립의 경우 상당한 규모의 반란에 부딪혔으나, 결국 히스기야를 제압하였으며 그 결과 유다는 므낫세 이후 오랫동안 앗수르의 속국이 되었다. 이 시대에 관한 성경의 자료는 유다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및 아몬에 대해 다룬 열왕기하 16-21장, 이사야 36-39장, 역대하 28-33장, 호세아서 및 미가서 일부가 있다.

8세기 초반, 앗수르의 왕들은 지방 관료들과 대립하는 강력한 지도자들이 아니었고 해외 원정 능력을 상실하여 주변국에 대한 영향도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디글랏빌레셀 3세에 의해 역전되었는데, 그와 그의 후계자인 사르곤 2세는 앗수르를 내부적으로 재정비하고 해마다 해외 원정을 통해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강력한 총독을 가진 지방들이 여러 개의 소규모 지방으로 교체되었고 중요한 군사 및 행정직을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에게 부여함으로써 관료들의 권력을 제한하였다.

앗수르에게 가장 이상적인 통치 방법은 국경 너머의 지역은 직접 다스리기보다 조공을 받아내고 정치적 복종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토착왕들은 앗수르의 요구에 순응하면 계속하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앗수르가 서부 국가들에 대해 진행한 세 가지 정치적 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토착왕들이 조공을 냄으로써 왕위를 유지하는 속국이 있고 둘째, 앗수르가 제국에 충성할 수 있는 토착인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운 괴뢰국이 있고, 마지막으로 앗수르가 파견 총독을 통해 직접 통치하는 합병 단계가 있다.2)

앗수르는 많은 강대국과 국경을 마주했다. 남쪽의 바빌로니아, 남동쪽의 엘람, 북쪽의 우랄투,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들은 크고 강하여 앗수르가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다. 디글랏빌레셀 3세부터 아슈르바니팔까지의 왕들은 모두 이 강대국들을 잘 관리해야 했으며, 유연성 있는 정책으로 다루었다. 특히 바빌론은 앗수르의 문화와 종교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바빌론에 대한 존경으로 이어졌기에 다른 지방과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 없었다. 앗수르의 마지막 여섯 왕의 통치 동안 바빌론에서는 20번의 정권 교체가 있었는데, 이와 같은 수많은 정권교체는 앗수르가 바빌론을 제어할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집트는 엄청난 경제력 때문에 자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에살핫돈은 속국 제도를 통해 남부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치를 확고히 한 후 이집트를 침략했다. 그는 노년에 세 번의 군사 원정을 통해 누비아의 타하르카(690-664)를 축출하고 수도 멤피스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에살핫돈 사후 타하르카는 다시 이집트 전체에 대한 권력을 잡았고, 아슈르바니팔이 보낸 앗수르 군대는 성공적으로 이집트를 공격했으나 델타 지역의 속국들의 반란으로 더 이상 남진할 수 없었다. 640년 앗수르는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서부 이란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불과 30년 뒤, 앗수르 제국은 멸망한다.3)

[아슈르바니팔과 이집트] 
- 664년 이후 쓰여진 아슈르바니팔의 기록 
“그들(타하르카와 이집트)은 반복적으로 나의 통치의 힘인 앗수르 군대에 대해 악을 계획했다. 그들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계획하고 전대미문의 악행을 하려 하였다. 나의 관료들이 이것을 듣고 그들에게 재치있게 보복했다. (...) 신들의 왕, 앗수르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했다. 신들의 위대한 맹세를 어기고 죄를 지었다. 내가 선행을 베푼 자들에게 일을 맡겼다. 그들과 연합하여 악을 꾀한 크고 작은 모든 도시의 사람들을 그들의 무기로 도륙하도록 시켰다.”

4)

앗수르의 급속한 붕괴의 원인은 제국의 기본적 구조의 문제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힘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구조는 유능한 왕이 세워졌을 때는 매우 효과적이었으나, 왕위 계승으로 인한 내분은 국가를 크게 불안하게 만들었다. 또한 변방의 국가들은 앗수르의 강압적인 보복에도 늘 반란을 일으켰다. 보급 기지로부터 단절된 제국의 핵심부는 거대한 도시들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게다가 거주자의 상당수가 유배되어 온 외국인이었다. 결국 약한 기초 위에 세워진 제국에 위기가 찾아왔고 외부의 압력과 내부 분쟁의 요인이 결합되어 앗수르 제국 전체가 갑작스럽게 붕괴한 것이다. 5)

앗수르가 정복한 민족들의 후대 전통은 앗수르의 몰락에 대해 언급한다. 예를 들어 니느웨의 몰락을 신의 형벌로 해석한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정복한 앗수르 왕들이 신의 형벌로 몰락한 것 같이 바빌론을 파괴한 산헤립도 몰락할 것이다. 앗수르는 거만했었다. 앗수르에게 당한 나라들은 그들의 몰락에 환호했다. 6)

2. 신-바벨로니아의 등장

626 나보폴라살, 신-바빌로니아 왕조를 세움 
612 메디아와 바빌론에 의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함락
605 느부갓네살 2세, 갈그미스에서 이집트 무찌름 
587 느부갓네살 2세, 예루살렘 정복
585 아나톨리아에서 메디아의 팽창이 제지당함 
553 페르시아 왕 고레스 등극 
552 나보니두스가 테이마로 감 
539 고레스, 바빌론 함락

7)

앗수르의 군사적 패배는 주로 메디아와 바빌론 두 민족에 기인한다. 이 두 민족은 고대 근동 지역에 비교적 늦게 등장한 민족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치 조직과 생활 양식을 가졌다. 메디아는 유목을 하는 산족들로 중앙 자그로스 산맥 출신이다. 8세기에 가서야 그들의 요충지에 도시들이 등장히였다. 바빌론 왕조는 7세기 말 등극하여 메소포타미아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도시 전통들을 이어왔다. 이들은 앗수르 제국과 같이 근동 전체를 아우르는 제국을 형성하였지만 이집트, 페르시아, 스키타이족 등과 대결해야 했다.8)

앗수르의 아슈르바니팔의 죽음 이후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앗수르의 지배가 약화되자, 626년 나보폴라살이 바빌론의 왕위를 차지하고 616년 바빌론 전체를 통일한다. 그는 신-바빌로니아로 칭한 왕조를 세우고 앗수르 제국의 멸망에 참여하였다. 바빌로니아는 앗수르 제국이 다스렸던 영토의 대부분을 그대로 얻어내었다. 앗수르 제국의 마지막 10년에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이 앗수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집트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앗수르 멸망 후 바빌로니아와 이집트는 그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대결하게 된다. 느부갓네살 2세는 아직 왕세자였을 때, 바빌로니아 군을 이끌고 이집트와 전쟁하였고 605년에는 북시리아 도시 갈그미스 근처에서 이집트인들을 무찔렀다.9) 느부갓네살은 바빌론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른 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다니엘 1장에 언급된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것은 아마 이때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대기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의 첫 해에 하티지역(시리아-팔레스타인의 지역 전체) 모든 왕들이 그 앞에 나와 무거운 조세를 바쳤다고 한다.10)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는 문제가 많았다. 6년 동안 3명의 왕이 바뀌고 그 중 두 명은 암살당했다. 마지막으로 왕족 출신이 아닌 나보니두스(555-539)가 왕이 되었다. 나보니두스의 어머니 아닷-구피(Adad-guppi)는 달의 신, 신(Sin)의 신봉자였다. 그녀는 아슈르바니팔의 즉위 20년에 태어났고 95년 동안 그 신을 봉양했다고 기록한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나보니두스 역시 달 신을 숭배하였고, 이 때문에 마르둑 제사장들의 미움을 샀다. 제사장들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한 것은 552년 아들 벨사살에게 수도 바빌론을 맡기고 자신은 아라비아 사막의 오아시스로 이주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왕이 주재해야 했던 새해 축제가 바빌론에서 중단되었다. 게다가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돌아와서마르둑 성전을 포함한 몇몇 신전을 달의 신인 신을 위한 신전으로 개조하였다.

<바빌론의 제사장들이 나보니두스에 관해 기록한 글> 
“(나보니두스의) 수호신이 그를 대적하게 되었고, 
이전에 신들의 사랑을 받던 그가 이제 재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가 신들의 뜻을 거스려 거룩하지 못한 일을 행하고 무익한 것을 추구했다.
그는 이 나라에서 누구도 보지 못했던 신상을 만들었고 그것을 신전 주춧대 위에 두었으며
그 이름을 난나(달신)라 불렀다.” 

11)

그러나 나보니두스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로 사막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국제 정세에 관해 매우 정통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아라비아에서 달신 종교가 번성했지만 나보니두스의 비문에서는 그곳에서 달신 숭배를 장려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왕궁을 사막으로 옮겼던 중요한 요인은 이란에서 발생한 정치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559년 고레스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고 550년 자그로스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나보니두스는 고레스의 팽창주의적 야망을 잘 알고 있었으며, 북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는 아나톨리아에서 올라오는 군대의 쉬운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 영토를 잃으면 바빌로니아는 지중해로 가는 통로를 잃어버리게 되고 나보니두스는 사막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바빌로니아에서는 나보니두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기에 페르시아는 더욱 수월하게 그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다. 539년 고레스는 디얄라와 티그리스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승리한 후 전쟁 없이 도시들을 정복하였다. 바빌론이 무너지고, 수세기 동안 지속된 바빌로니아 왕조도 끝이 났다. 수도를 접수하면서 페르시아인들은 바빌로니아 제국 전체를 이어받았다. 고레스는 나보니두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이용해 바빌로니아에서의 통치를 정당화하였다. 그는 자신을 마르둑이 정의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선택한 구속자로 선전하였다. 나보니두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유대 전통에서도 전해진다. 주전 1세기 사해 문서에 따르면, 나보니두스는 테이마에서 중병에 걸렸다. 헬레니즘 시대에 기록된 다니엘서에도 그 이미지가 더욱 증오의 대상인 느부갓네살에게 전이된다.12)

신-바빌로니아 왕조는 고대 근동 역사에서 메소포타미아인들에 의한 마지막 메소포타미아 왕조였다. 그러므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종말은 중요한 사건이다. 왕들은 자신을 제3천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바빌로니아의 위대한 전통의 일부라고 자처하고 그 전통에 대한 의식을 고취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문화는 왕조가 전복될 때까지 매우 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그리고 왕조는 없어졌지만 바빌로니아 문화는 다음 역사에도 살아남았다.13)

문헌 내용 요약 (유종현)

1. 신-바벨로니아 연대기 요약

(각 인물과 사건의 요약은 교재(신바벨로니아 연대기)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함.)

1) 디글랏빌레셀 3세, 살만에셀 5세, 사르곤 2세의 왕위 차지

(본 자료의 연도는 모두 주전(B.C.)이며 인물(왕)과 관련된 연도는 재위기간임.)

731년,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 3세의 치세 동안 바빌로니아 정치는 복잡한 분열 양상을 보였다. 아시리아와 동맹관계이던 바벨론의 나부나딘제리(733-732)가 신하들에 의해 폐위되고 고대 바빌론 왕가의 인물이 아닌 무력을 가진 외부 인물인 갈대아 비트아무카니 부족의 지도자 무킨제리가 바빌로니아 왕좌를 차지했다.14) 디글랏빌레셀(3세)은 이를 앗수르의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기에 729년, 그는 무킨 제리를 공격하여 물리치고 “바빌론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디그랏빌레셀은 바벨론이 모든 정치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비록 더디지만 경제의 회복이 진행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바벨론 시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새해 초에 바빌론의 신 마르둑을 기리는 아키투 축제에 두 번이나 참여했다. 15)

바벨론 왕명록을 보면 디글랏빌레셀 3세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가 본명인 풀루와 울룰라유로 바벨론 통치자 명단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바빌로니아 영토를 아시리아 제국의 속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6)

샬만에셀(5세)이라는 왕위를 계승한 디글랏빌레셀의 아들이자 후계자 울룰라유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남부의 상황은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통치 말기에 그는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를 정복한 것으로 보이며 시리아 북부의 Sam’al과 실리시아의 Que도 합병했을 수 있지만 이는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사건에 대한 정보는 후대의 자료와 바벨로니아 연대기, 히브리어 성경과 같은 아시리아 이외의 텍스트에서만 얻을 수 있다. 살만에셀의 이름으로 기록된 어떠한 의미 있는 왕실 비문도 없으며, 아시리아 시조 연대기 역시 그의 통치 기간에는 단편적으로만 보존되어 있다. 17)

722년, 사르곤(앗수르어: 사루우킨)은 살만에셀(5세)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전임 살만에셀처럼 디그랏발레셀 3세의 아들이었지만, 아마도 찬탈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권좌에 오른 정확한 경위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통치 초기에 대규모 내부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는 사르곤의 비문 중 하나에 새겨진, 새 왕이 정치적 반대자로 추정되는 6300명의 “죄 많은 아시리아인”을 하맛으로 추방했다는 진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사르곤은 결국 국내의 적들을 물리치고 왕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지만, 앗수르 제국의 가장자리에 있는 여러 지역들은 중앙의 일시적인 불안정을 이용해 독립을 쟁취하기 시작했다.

721년 초에 갈대아 국가 비트야킨의 지도자 마르둑아플라이디나(므로닥발라단) 2세가 왕위를 탈취하고 동쪽의 엘람과 동맹을 맺으면서 아시리아 후기 바빌로니아에서 일련의 반 아시리아 봉기가 발생했다. 사르곤은 마르둑아플라이디나를 지지하는 아람 부족을 공격하고 720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엘람 왕 오우반니카스 1세와 싸우기 위해 데르(Der) 시로 향했지만, 마르둑아플라이디나의 권좌 제거는 실패로 돌아갔다. 실제로 바빌로니아 연대기에는 아시리아가 데르에서 패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

2) 산헤립의 죽음과 에살하돈의 왕위 계승 (681)

산헤립은 수년 동안 자신의 아들 우르두-물리시(Urdu‐Mullissi)를 후계자로 키웠다. 그러나 683년경 어느 순간 마음을 바꿔 다른 아들인 에살하돈(아슈르-아후-이디나 Aššur‐ aḫu‐iddina)을 왕세자로 지명했다. 이 결정은 이 시기에 점점 더 강력해진 에살하돈의 어머니 나키아(Naqia)에게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우르두-물리시와 그의 지지자들은 새로운 합의에 분개하며 왕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에사르하돈을 서쪽 어딘가로 추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산헤립이 우르두-물리시를 복권하도록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래서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681년 말 니네베의 한 신전에서 왕을 살해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에살하돈은 한겨울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아시리아 수도로 돌아와 왕을 살해한 자들을 궤주시켰고 산헤립이 살해된 지 두 달 후, 아시리아 왕좌에 올랐다. 19)

3) 갈그미스 전투 (605)

바벨로니아 왕 나보폴라살(626-605)은 607/6년 새로운 원정을 감행했지만 한 달도 안되어 자신의 왕국으로 철수했는데 이는 나이와 건강 등의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왕세자 느부갓네살이 지휘하는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볼 때, 왕실 군대와 바벨로니아 군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

왕은 바벨로니아에 머물러 있었고 왕세자 느부갓네살이 그를 대신하여 총사령관이 되어 분열된 군대를 직접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갈그미스(Carchemish)까지 행군했다. 이집트군은 최근에 점령한 키무후(Kimuhu)와 쿠라마티(Quramati) 마을에서 철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두 곳에서 더 이상 교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바벨로니아의 대규모 군대가 적군을 행군로에 남아있게 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공격에서의 주도권과 기습 능력은 느부갓네살의 높은 군사적 명성과 일치한다. 21)

바벨로니아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 강둑으로 건너가 갈그미스 근처에서 이집트 군사들과 교전을 벌였는데 처음에는 도시 내에서, 나중에는 광야에서 전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갈그미스에서 발굴된 유적은 도시가 불타오를 때까지 얼마나 완고하게 방어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집트 군대는 전투 초반에 신속하게 탈출한 잔여 병력을 제외하고는 전멸했다. 느부갓네살은 도망간 이집트 군사들을 추격하여 하맛 지방에서 완전히 패배시켰는데 연대기 작가는 그때 상황을 '자기 나라로 도망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갈그미스 전투에 대해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여호아김 4년에 느부갓네살은 바벨로니아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에 있는 갈그미스로 가서 온 시리아를 통치하던 이집트 왕 느고와 싸웠다. 느고는 바벨로니아 왕이 자신을 대적하기 위해 이번 원정을 의도한 것을 알았고 급히 많은 무리의 군사를 결집하여 느브갓네살을 막기 위해 유프라테스로 갔으나 그 전투에서 그는 수만의 병사들을 잃었고 결국 참패하고 말았다. 바벨로니아 왕은 유프라테스를 넘어 유다를 제외한 이집트 펠루시움까지 이르는 모든 시리아 지역을 정복했다. (Antiq. Jud. X,  6  (84-86))

22)

느부갓네살이 나보폴라사르가 죽은 아브월 8일(주전 605년 8월 15일/16일)에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왕세자는 최단 경로로 소규모의 기마대를 이끌고 귀환하여 왕이 죽은지 23일만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23)

4)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침공과 시드기아 왕 임명 (598/597)

바벨로니아 연대기 석판은 바빌론 발굴에서 발견되어 1956년에 처음 번역된 후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석판에는 605-594년, 즉 나보폴라살 21년(605년, 느부갓네살이 왕위에 오른 해)부터 느부갓네살 재위 11년까지 12년간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597년 바벨론의 1차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게 함락된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열왕기하 24장).

아카드 설형문자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597년 기슬래월에 바벨로니아 왕[느부갓네살]이 군대를 소집하여 하투[시리아, 이스라엘, 유대의 땅]로 진군했다. 그는 유다 성[예루살렘]에 진을 쳤고, 아달월 2일에 성을 점령하고 왕[여호야긴]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선택한 왕[시드기야]을 임명하고 막대한 조공을 거두어 바빌론으로 돌아갔다.

24)

5) 고레스 왕의 바벨론 입성 (539)

신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이었던 나보니두스는 아라비아 북부의 테이마(Teima)에서 골동품 수집과 종교적 취미에 빠져 14년 동안 수도를 떠나 있었다. 그는 바벨로니아 숭배의 주요 종교 의식인 바벨론의 새해 축제(아키투)에도 계속 참여하지 않았으며 바벨론과 제국의 정부는 신바빌로니아의 무능한 통치자 중 하나인 그의 아들 벨사살의 손에 달려 있었다.

나보니두스는 고레스가 자신의 제국에 심각한 위험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하고 539년 봄에 바벨론으로 돌아왔으며 바벨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신상들을 들여오기도 했다. 539년 10월 초 고레스는 티그리스 강 오피스(Opis)에서 바벨로니아 군대를 격파했고, 10월 10일에는 시파르(Sippar)를 전투 없이 함락했다. 나보니두스는 서둘러 바벨론을 떠났고, 10월 12일 페르시아로 망명한 느부갓네살의 장군이었던 구티움 총독 고브랴스(우그바루) 휘하의 고레스 군대가 도시로 들어왔다. 다니엘 5:30에 따르면, 그날 밤 갈대아(신바벨로니아)의 벨사살 왕이 죽임을 당했다.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으로 돌아왔을 때 포로가 되었다. 고레스는 10월 29일에 직접 도시에 들어와 시민들에게 자신을 해방자로 소개했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에는, “아라삼누 달 3일에 고레스가 바벨로니아에 입성했는데, 그의 앞에 푸른 나뭇가지들이 펼쳐져 놓였고 도시에 '평화'가 선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레스는 바벨론 전역에 인사를 보냈다. 바벨로니아 신전 관리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고레스 실린더에는 “왕자들과 총독들을 포함한 바벨론, 수메르와 아카드의 나라 모든 주민이 그(고레스)에게 절하고 그의 발에 입 맞추며 밝은 얼굴로 그가 왕권을 받은 것을 기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벨론 정복은 도시의 신 마르둑의 업적으로 설명되었다: “[마르둑]은 (연례 행렬에서) 그를 이끌 정의로운 통치자를 찾기 위해 모든 나라를 살펴보았다. (그후에) 그는 안산 왕 고레스의 이름을 온 세상의 통치자(로) 선포했다 … 위대한 군주이자 백성/숭배자들의 보호자인 마르둑은 그(고레스)의 선행과 올곧은 마음을 기뻐했고 (따라서) 그에게 자신의 도시 바벨론을 향해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마르둑은 그를 바벨론으로 떠나게 하면서 그의 옆에서 진정한 친구처럼 동행했다 … 그는 전투 없이 바벨론으로 들어가 바벨론을 재앙에서 구했다” (Cyrus Cylinder). 25)

2. 신-앗수르 이름의 시조연대기

https://oracc.museum.upenn.edu/saao/saas2/Q007771/html

아시리아 시조 목록(the Assyrian Eponym List)이라고도 알려진 림무 목록(the Limmu List)은 아시리아 관리(림무, 또는 시조 행정관)의 이름을 연대에 따라 부여한 목록이다. 이 목록은 고대 아시리아 연대기의 기초가 되었으며, 지금도 메소포타미아의 연대기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달력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는 봄이 시작될 때 열리는 새해 축제였다. 아시리아에서는 왕이 아수르(Assur, 수도)에서 열리는 축제 기간 동안 진행을 책임져야 했지만, 왕은 왕실 관리인 림무에게 그 일을 위임했다. 림무는 제비뽑기로 선발되었는데, 후보자들은 총사령관, 궁전의 전령, 총독과 같은 아시리아의 가장 중요한 가문들 출신이었다.

림무가 되는 경우는 좀처럼 흔하지 않았기에 림무의 이름을 사용하여 연도를 표시하는 것은 용이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전 820/819년이라고 부르는 연도는 “왕궁의 전령인 벨-단이 림무의 직위를 맡은 기간”이라고 불렀다. 거의 모든 연도에는 중요한 군사적 업적이 추가되었으며, 림무 목록은 1876~1780년과 858~699년에 남아 있다.

림무들의 목록이 신중하게 보관되었기 때문에(858~699년에 대한 석판이 10개 이상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함), 림무 목록을 기반으로 하는 아시리아 왕 목록은 매우 정확한 것으로 간주된다. 26)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시조 목록에 대한 증거는 카룸-카네쉬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은 아나톨리아의 다른 아시리아 식민지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샴시-아다드 1세(1808-1776)가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함으로써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27)

문헌에 언급되어 있는 인물에 관한 정보 (서강희)

1) (나부) 무스킨 제리 (731~729)

(나부) 무스킨 제리(또는 무킨 제리)28)는 슈마우킨 2세(Nabû-šuma-ukîn II)의 뒤를 이은 바빌론의 왕으로, 디글랏빌레셀 3세의 사피아 요새를 침공이 있기 전까지, 기원전 732년부터 729년까지 왕으로 재위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왕이 되기 전, 남부 바빌로니아의 칼데아 아무카누(Chaldean Amukanu) 부족의 족장으로 있었고 나라가 불안정한 틈을 타, 지도자 (나부) 슈마 우킨 2세(Nabû-šuma-ukîn II)를 축출하며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나부) 무스킨 제리 때로부터 바빌론 제 9왕조29)가 시작되는 데,었고 이를 신-앗수르 제국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티글랏 빌레셀에 의해 축출되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기점으로 보게 된다.

2) 므로닥 발라단 2세 (721~710)

므로닥 발라단 2세30)는 기원전 721-710년, 그리고 703년 9개월의 재위한 바빌론 왕국의 왕으로, 약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앗수르의 패권(사르곤 2세)에 맞서 바빌론의 독립을 유지한 인물로 알려져있다.(당시 바빌론은 앗수르의 사르곤 2세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므로닥 발라단은 주변의 세력을 규합하여 반앗수르 동맹을 결성한 것이다.)

사르곤의 비문에 의하면 므로닥 발라단이 엘람의 권사력에 의존하여 바빌론의 권위를 찬탈한 사람으로 묘사되어있지만 므로닥 발라단은 바빌론에서 앗수르를 몰아낸 적법한 후계자라 주장하였다. 바빌론 문서에 따르면, 므로닥 발라단의 재위기간 동안 사원이 수리되었고 관개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평탄했다고 전해진다.

성경에서, 병에서 고침 받은 히스기야 왕에게 축하 사신을 보낸 사람이 바로 므로닥 발라단이다. 히스기야는 브로닥 발라단이 보낸 사신들에게 궁중의 무기고와 보물고를 보여주게 되었고 이에 이사야는 나라가 곧 바빌론의 포로가 될 것이라 경고한다.

앗수르 기록31)에 따르면, 므로닥 발라단은, 기원전 710년 바빌론 남쪽을 향해 진군한 사르곤에 의해 왕권을 잠시 빼았기게 되었고 705년, 사르곤이 죽은 후, 신-앗수르 군주 산헤립에 대한 불안을 조장하고자 유다 히스기야 왕에게 사절단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703년 다시 바빌론의 왕권을 되찾게 되었으나, 같은 해, 산헤립의 진군으로 인해 다시 왕권을 빼았기게 된다.

3) 에살핫돈 (680-669)

에살핫돈32),33)은 사르곤 2세의 후손으로 기원전 680-669년 동안 앗수르를 통치한 왕이었다. 그는 671년 이집트 정복으로 잘 알려져있다.

에살핫돈은, 그의 아버지 산헤립이 바빌론을 점령한 뒤 아버지에 의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으며 산헤립은 에살핫돈의 형제 중 한명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에살핫돈은 진군하며 여러 반란군을 만났지만 반란군의 대부분은 그에게 항복하였고 지도자들은 도망쳤다고 하며, 결국 에살핫돈은 반대 세력 없이 쉽게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산헤립 치하로 인해 북부 바빌론 도시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나, 에살핫돈은 오히려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전해진다. 에살핫돈의 정책은 아버지 산헤립이 파괴했던 바빌론 시내와 신전을 재건하며 실향민들에게 토지를 회복시켜주는 정책을 펼쳤고 자신의 영토에 침범한 갈대아 부족에 대해 군사적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에살핫돈은 이집트가 반란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이집트(애굽)를 공격했고, 671년 멤피스를 비롯한 이집트 영토 전체를 얻게 된다. 이로 인해, 에살핫돈이 왕위에 있을 때, 앗수르 영토는 최대로 확장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후 에살핫돈은 669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하란에서 사망하게 된다.

4) 느부갓네살 2세 (605~561)

느부갓네살 2세(네부카드네자르 2세)34),35)는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를 이어 신바빌론 제국의 왕이 되었으며, 기원전 605-561년 동안 재위하며 신바빌론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 수도 바빌론에 바빌론의 문, 마르둑의 지구라트, 공중정원 등 여러 건축물과 더불어 군사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설형문자 비문과 더불어 구약성서에서는 다니엘서에 유대와 예루살렘을 정복한 왕으로 기록 되어있다.

성서 연구에 있어 연대기 문헌이 중요한 이유 (김요셉)

신앗수르 시조연대기와 신바벨로니아 연대기는 성서 연구에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들은 구약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유대인의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성서의 여러 예언의 성취, 종교적 의미, 또한 문화적인 부분과 관련하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1) 역사적 배경 제공

신앗수르 시조연대기와 신바벨로니아 연대기는 각각 유다 왕국의 사로잡힌 유대인들의 강제 이주,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을 기술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연대기는 바빌로니아와 앗수르 제국의 역사적 사건들과 유다 왕국의 소식을 다룸으로 성서에서 언급되는 많은 사건과 인물들과 연결된다. 특별히, 고대 근동 연대기 문서에서 다루고 있는 '유다 왕국의 말종기'와 그 후의 '바빌로니아 포로사'는 '예레미야'와 '다니엘서'에서도 다뤄지는 중요한 사건들로 여겨진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중요한 구간으로, 성서에서 이와 관련된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이 연대기들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건이 두 연대기 문서에 기록된 사건들과 중첩되게 되는데, 이러한 성서의 외부 기록들은 성경의 신뢰성과 정확성을 뒷받침해 준다.

2) 예언의 성취 확인

성서에 있는 여러 예언들은 이들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서 25:11에서는 바벨론의 포로가 70년 후에 귀환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는데, 이러한 예언은 신바벨로니아 연대기에서의 사건과 일치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3) 종교적/문화적 중요성

신앗수르 시조연대기와 신바벨로니아 연대기는 종교적 가르침과 교훈을 담고 있다. 이 두 문서는 유대인들의 믿음과 충성, 하나님의 축복과 심판, 은혜와 정의에 대한 교훈을 제공한다.

특별히, 바벨론 포로사와 관련된 사건들은 보게되면 포로로 잡힌 후에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와 문화적 색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문서들은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문화와 생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함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신앙, 사회적 구조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고대 유대인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 신-앗수르 시조연대기

신앗수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초기의 문명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신앗수르 시조 연대기는 메소포타미아 역사의 초기 단계부터부터 앗수르(Assyria) 제국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 연대기는 신명, 군주, 전쟁, 그리고 종교와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성서 속에서 언급되는 많은 사건들의 배경을 포함하고 있다.

특별히 이 연대기를 통해 과거 유다 왕국과 앗수르 제국사이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은 메소포타미아의 강력한 제국 중 하나였으며, 유다를 포함한 다른 지역들과 교류를 하거나 침공 전쟁을 벌이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실제, 앗수르 왕국은 유다 왕국을 공격하고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가는 등의 침공을 하였는데, 이러한 침공과 전쟁에 관한 내용은 성경의 여러 권에서 다루어지며 신앗수르 시조 연대기는 이러한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앗수르 제국과의 교류와 충돌은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신앗수르 시조 연대기는 이러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 독자에게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2. 신-바벨로니아 연대기

신바벨로니아는 바벨론(Babylon) 제국의 수도로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중요한 도시로 손꼽혔다. 이러한 신바벨로니아의 연대기는 바벨론 제국의 왕들과 그들의 정책이나 군사 활동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특별히 이 연대기는 바벨론 제국의 역사적 사건들을 다룸과 동시에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사와 관련된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벨론 포로사는 약 기원전 6세기 초반에 발생했으며, 앗수르 제국의 유다 침공 이후, 바벨론 왕국이 유다를 정복하여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간 사건이다. 당시 바벨론 왕국은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제사장, 귀족, 및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게 되는데 이는 예레미야와 다니엘 같은 성경의 책에서 상세히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다.

당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 중, 몇몇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고, 이후 바벨론 왕국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정권을 잡았을 때,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어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재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귀환과 재건의 과정은 성서의 역사적인 서적 중 하나인 에스라서, 느헤미야서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바벨론 연대기는 성서의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의 배경을 제공하고, 성서의 역사적 내용과 상호작용하는 부분을 제공한다. 바벨론 왕국의 역사와 유대인들의 역사는 성서의 주요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배경 지식은 성서를 더 잘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경본문과의 유사성 및 차이점

1)
마르크 반 미에룹/김구원 역, 『고대 근동 역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1), 359.
2)
Ibid., 361.
3)
Ibid., 368-370.
4)
Hans-Ulrich Onash, Die Assyrischen Eroberungen Agyptens (Wiesbaden: Harrassowitz Verlag, 1994), pp. 104-115.
5)
Ibid., 387-388.
6)
Ibid., 388.
7)
Ibid., 391.
8)
Ibid., 392.
9)
Ibid., 399.
10)
월터 카이저/류근상 역, 『이스라엘의 역사』 (고양: 크리스챤출판사, 2010), 528-529.
11)
황성일, 『구약배경사』 (대전: 그리심어소시에이츠, 2016), 90.
12)
다니엘 4:33
13)
마르크 반 미에룹/김구원 역, 『고대 근동 역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1), 413.
14)
카렌 라드너/서경의 역, 『바빌론의 역사』 (서울: 더숲, 2021), 162.
15)
Eckart Frahm, A Companion to Assyria (Hoboken, NJ: Wiley-Blackwell, 2017), 178.
16)
카렌 라드너/서경의 역, 『바빌론의 역사』, 162.
17)
Eckart Frahm, A Companion to Assyria, 180.
18)
Ibid., 180-181.
19)
Ibid., 186.
20)
D. J. Wiseman, Chronicles of Chaldaean Kings (626-556 B.C.) in the British Museum (London: British Museum, 1956), 20.
21)
Ibid., 23.
22)
Ibid., 23-24.
23)
Ibid., 26.

토론

kungsik, 2024/04/30 10:38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서버가 약간 부실한 서버라.. ㅜㅜ 본 문서의 단어수가 2만자가 넘어가다 보니 서버 오류가 생기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을 별도의 문서로 따로 떼어서 링크로 연결했으니 참고 바랍니다.
kungsik, 2024/04/29 10:36
에고.. 뭔가 서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지금 확인 중이고요.. 김요셉 학우의 글은 제가 수동으로 추가해 놨습니다. 수정사항은 급한대로 댓글에 올려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요셉, 2024/04/29 01:23
저도...내용 입력을 하려니 bad reqeust요런 문구만 나오네요..ㅠ
서강희, 2024/04/28 23:49
교수님 제가 지금 수정하고 추가할 내용이 있어서 수정을 하려니 BAD REQUEST이런 문구만 나오고 수정이 안되네요..ㅠ
kungsik, 2024/04/26 20:43
더 생각해 봤으면 하는 포인트 - 여기서 언급된 신앗수르/신바벨론의 역사들이 성경에서는 어떻게 조명되고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kungsik, 2024/04/26 20:00
일정이 촉박한 가운데 잘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발제 안내에 적어드린대로 한명씩 고대근동문헌과 성서 본문의 유사성 및 차이점을 간단하게라도 적어 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근동 연대까기 문헌이 나타내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와 성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시고 간단하게 정리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용시온, 2024/04/27 23:30
교수님~ 시험기간이라 시간도 넉넉히 주시고 여러모로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사성과 차이점 추가해보았습니다. 다른 팀원분들도 계속 작성 중이셔서 주일 저녁까지 올려드릴 예정입니다~!
kungsik, 2024/04/28 07:11
넵. 고생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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