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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본문과의 유사성 및 차이점 (전쟁 보고문)

오예문

유사점

산헤립의 701년 서부 군사 작전과 열왕기하에서 보여지는 유사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동일한 사건에 대한 내러티브, 기사가 성경 안과 성경 밖에서 모두 보존된 드문 사례인데 대부분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치는 내러티브 30달란트의 금, 300달란트 의 은 성전 문에 입힌 금까지 벗겨 왕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과 조공의 양이 비슷하다점이 유사하다.

차이점

산헤립 문서와 성경의 차이는 겉으로 보여지는 몇가지 점들은 아카드어, 히브리어 각각 작성되었다는 점과 1인칭, 3인칭이라는 점이 다르고 산헤립의 문서는 내 주(신) 아슈르 중심의 신앙을 바탕으로, 열왕기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산헤립의 문서에서는 앗수르가 점령한 성읍들의 명칭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열왕기하에서는 모든 견고한 성읍이라는 표현으로 포괄적으로 작성된 특징을 볼 수 있다. 열왕기하 13절의 구절을 그대로 옮기자면 “히스기야 왕 제 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로 산헤립이 유다를 점령했다는 결과를 한문장으로 서술하지만 산헤립의 문서에서는 조금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은 유다 사람 히스기야에 대해서는 그의 요새화된 벽으로 둘러싼 성읍과 적지 않은 주변 작은 마을 가운데 46곳을 포위 했다. 단단하게 굳은 경사로를 이용하고, 공성 망치, 비밀 계략에 의한 보병대의 공격, 폐쇄기, 포위 장비를 적용하면서 나는 그들을 정복했다. 17) 점령지와 또 점령한 방법들을 몇가지 열거하며 자신의 업적을 이야기 한다.

14절에서는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산헤립에게 사람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게 되는 구간이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산헤립의 문서가 더 자세한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약탈했던 그의 성읍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 아스돗의 왕 미틴니, 에그론의 왕 바디, 가자의 왕 실리 벨에게 주었고 따라서 그의 땅을 축소시켰다. 나는 그를 통치하는 지배권에 대해 매년 지불하는 이전 조공 외에도 세금과 선물을 부과했다. 히스기야, 그는 내 지배권의 놀라운 탁월함에 압도됐으며, 내가 나의 성읍 니느웨로 떠난 후에, 그는 그는 그의 정예부대, 최상의 군인들을 내게 보냈는데, 그 부대 군인들은 그가 자신의 딸들과 왕궁 여자들과 노래 부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30달란트의 금과 800 달란트의 은, 최상의 안티몬, 큰 덩어리의 홍옥수, 상아로 만든 침대, 상아로 만든 의자, 코끼리 가죽, 상아, 흑단 나무, 회양목, 다채로운 옷, 세마포 옷, 자주색과 정자색 양모, 구리와 철과 청동의 용기, 주석, 철, 전차, 포위를 위한 창, 갑옷, 허리띠에 달린 단검, 활과 화살, 수많은 전쟁 장신구와 기구들로 자신의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을 강화하려고 증원 부대로 데려왔었다. 그는 조공을 전달하고 경의를 표하라고 자기 전령을 급파했다.18)

열왕기하에서는 히스기야가 산헤립에게 범죄하였음을 인정하며 산헤립이 요구하는 양의 조공을 바치겠다 선언하는데 산헤립이 요구하는 양은 은 삼백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로 보여진다. 그러나 산헤립의 문서에는 은금 뿐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바쳐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리품으로 챙겼다고 하는 200,150이라는 숫자는 열왕기하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 숫자는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는 의견이 있고, 산헤립은 포위 공격 이후에 조공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성경은 이에 대해 그리 명확하지 않다. 19)

이정석

산헤립의 701년 서부 군사 작전과 열왕기하에 기록된 이야기를 비교하는 것은 고대 역사와 성서 연구에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왜나면 성경 안과 성경 밖에서 모두 보존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산헤립 왕의 서부 군사 작전은 주로 유다 왕국을 비롯한 여러 지역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정복을 포함한다. 이 사건은 성경의 열왕기하에도 기록되어 있어, 두 기록을 비교하는 것은 고대 중동 지역의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두 문서는 서로의 입장과 기록의 이유, 목적이 다름에도 많은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두 기록 모두 산헤립이 유다 왕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를 침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산헤립의 기록과 열왕기하의 기록 모두 산헤립이 유다 왕국을 공격하고 여러 성을 점령했음을 기록한다. 둘째로 히스기야 왕의 반응이다. 두 기록은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침공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산헤립의 기록에서는 히스기야가 굴복하고 많은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한다. 이는 열왕기하에서도 언급되며, 히스기야가 산헤립에게 은과 금을 지불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외에도 유다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하고 포로를 삼으며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는 기록. 예루살렘을 방어하기 위해 히스기야 왕이 전략적 조취를 했다는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들은 두 기록이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기록의 목적과 해석의 입장에선 많은 차이점이 나타난다.

열왕기하의 기록에 따르면, 유다 왕국에 대한 산헤립의 공격은 신적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아시리아 군대를 크게 치신다. 그 일로 185,000명의 군사가 죽임을 당하고 산헤립이 후퇴했다고 기록한다.

반면, 산헤립의 기록에서는 아시리아의 군사적 승리가 강조되며, 히스기야가 성 안에서 '새장 속의 새처럼' 갇혔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아시리아 군대의 전략적 성공을 강조한다. 그러나 열왕기하의 기록대로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후퇴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산헤립의 기록은 아시리아 왕의 권위와 군사적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작성되었기에, 히스기야 왕의 굴복을 강조한다. 하지만 열왕기하는 히스기야 왕의 신앙과 하나님의 보호를 강조하는 신앙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기록 되었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유사성과 차이점은 두 문화권의 기록 방식과 목적, 신앙적 배경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해석하고 기록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고대 역사를 연구할 때 각기 다른 출처를 비교하며 보다 넓은 관점에서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론적 접근이다.

함형진

열왕기하 본문과 산헤립의 본문은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물론 열왕기하 A기사는 산헤립 전쟁보고문 결말과 비슷하지만, B기사부터는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고 있다. 역대기에서 나오는 c기사는 더 나아가 히스기야의 영웅적 면모를 두각한다. 이런 점에서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는 두 번의 침략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두 번의 침략은 지금 보기에 뚜렷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

삼국지 게임을 하다가도 대군을 이끌고 남방을 정벌할 때, 엄청난 준비가 필요하다. 하물며 고대 전쟁에서 대군을 한번 더 일으켰다는 것은 산헤립의 정치적 생명과, 혹은 바벨론과 같은 패권의 전쟁이 아닌 이상 이해가 되기 어렵다. 남유다는 아쉽게도 패권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만약 한 번의 침략이었다면, 산헤립의 침공은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다. 왜 예루살렘을 포위만 하고 침략하지 않았는가? 적어도 히스기야의 항복을 받았다면, 왕권 교체를 왜 하지 않았는가? 등등 이러한 의문에 헤이즈는 남유다와의 관계에서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례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왕 히스기야를 강력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례적인 표현이다. 물론 본인의 업적을 높이기 위해 적국의 왕을 높이는 것은 흔하지만, 앗수르 입장에서 예루살렘 남유다는 매우 작은 나라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를 강력한 왕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그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과 혹은 친밀한 관계임을 암시한다. 또한 헤이즈는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남유다는 701년 이후 다시 봉신 관계가 되며 므낫세의 통치 기간에는 우호 관계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산헤립의 최후는 비참했다. 아슈르 신은 앗수르를 저버렸지만, 야훼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훼가 승리했다. 이것만으로도 열왕기하의 기록물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고대의 역사 기록은 팩트의 기록으로 보긴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교차 검증이 되는 본문은 매우 귀하고, 연구 가치가 충분하다. 교차 검증에도 불구하고 변형되고, 과장되는 이야기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각 이익이 되는 입장으로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와 산헤립의 내용이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은 (바친 공물의 수, 예루살렘 포위, 물러감) 엄청난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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