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 – 번역본이 주는 편견

성서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번역본으로 성서를 대하게 된다. 그런데 번역된 성서가 종교 경전으로써 갖는 위치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내용 자체를 100% 신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복잡한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공부하지 않는 이상, 아니 공부한다 할지라도 원어로 성서를 읽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만큼 번역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번역의 과정은 일종의 해석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정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100% 정확하게 문자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일이다. 그래서 번역자가 “스스로 이해하는 대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 왕의 말년에 일어났던 그의 죄악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12장은 북왕국과 남왕국의 분열 과정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과정 가운데 핵심적인 인물은 여로보암이다. 여로보암의 이야기는 11:26부터 40절까지 비교적 길게 서술된다. 그는 유능한 관료로 솔로몬이 행하고 있던 공역을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런데 그는 길에서 아히야 선지자를 만나게 된다(29절). 그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으로 요셉지파(므낫세, 에브라임) 지역의 공역 감독관이었기 때문에(26, 28절)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 향했던 길은 예루살렘 북쪽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히야 선지자는 에브라임 지파 지역에 속해 있는 실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여로보암은 아래와 같은 길목에서 아히야 선지자를 만났을 것이다.

예루살렘과 실로 사이는 위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산지길이고, 위에 표시된 도로를 달리면 황량한 산지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로보암은 공역의 상황을 예루살렘에 보고하고 다시 자신의 일터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 그는 아히야 선지자를 외딴 들판에서 마주하게 된다(29절). 성서는 그 둘 외에 아무도 없었음을 강조한다(ושניהם לבדם בשדה 그 둘만 들판에 있었다). 그만큼 여로보암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은밀하게 선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은밀히 왕의 기름 부음을 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사울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스스로의 질투심으로 인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부음을 주신 이후에도 사울을 직접 벌하지 않으셨다. 겉으로 볼 때 사울의 옹졸한 생각이 다윗과 스스로를 대립하게 만들고 몰락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예언대로 비참한 최후를 자초한 이는 사울 그 자신이었다.

솔로몬과 여로보암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왕으로 예언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가 없다. 왜냐하면 성서는 분명히 그 예언이 선포될 때에 아히야 선지자와 솔로몬만 외딴 들판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40절의 번역이 문제가 된다. 히브리어 본문은 아래와 같다.

ויבקש שלמה להמית את ירבעם

이에 대해 한글 개역개정판은 아래와 같이 번역한다.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개정개역)

개정 개역판은 “이러므로”라는 말을 삽입하여 앞서 나왔던 예언 선포와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던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성서에는 인과관계를 표현할 때, לכן (그러므로)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거나 예를 들어 בשמעו (그가 그것을 들었을 때에)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앞에 나온 사건과 연결하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유대역인 JPS 역시 아래와 같이 인과관계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Solomon sought to put Jeroboam to death (JPS)

어떤 특정한 이유가 상술되지는 않지만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다. 여로보암은 용사이고, 유능한 관리였기 때문에 사울이 다윗에게 그러하듯, 스스로의 질투심 때문에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는지 모른다. 통일왕국을 계속해서 이어가지 못하고 다음 세대에 분열 왕국 시대를 초래한 이는 결국 솔로몬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