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라 제국의 역대 왕들 (유다와 관련된 왕들)
- 프톨레미 왕조
- 305–283 BC Ptolemy I Soter
- 309–246 BC Ptolemy II Philadelphus
- 246-222 BC Ptolemy III Euergetes
- 221–204 BC Ptolemy IV Philopator
- 204-180 BC Ptolemy V Epiphanes
- 셀레우코스 왕조
- 305-281 BC Seleucus I Nicator
- 281-261 BC Antiochus I So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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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187 BC Antiochus III the Great
- 187-175 BC Seleucus IV Philopator
- 175-164 BC Antiochus IV Epiphanes
- 164-161 BC Antiochus V Eupator
- …
-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작
*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 알렉산더 대제의 장군들 중 하나로,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을 지지했던 페르디카스를 암살하고 바벨론의 총독으로 임명. 한 때 안티고노스에 의해 축출되었다가 후에 다시 바벨론을 수복하고 왕이 됨(기원전 301). 그는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을 통치. *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 * 셀루키아 (Selucia 305-240 BCE) * 안디옥 (Antioch 240-63 BCE) * 셀레우코스 왕조는 자신들이 점령한 곳을 헬라화하려 하였고 40여개의 주요 성읍들을 건설하게 됨. (아파메아, 라오디게아, 에데사, 베뢰아 등)
- 안티오쿠스 3세 (222-187 BCE)
- 기원전 198년 파네아스(Paneas, 성경의 빌립보 가이사랴) 전투를 통해 프톨레미 왕조를 유대 지역에서 몰아내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차지하게 됨.
-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고 세금을 면제해 줌. 유대의 법률 또한 인정해 주었고, 코셔가 아닌 음식물을 예루살렘에 반입하지 못하게 함.
- 이 시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수는 점차 증가했음. 그리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유대 지역을 다스림에 따라 프톨레미 치하에 있는 이집트의 유대인들과 유대 본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분리 되기 시작.
- 기원전 190년 서머나에서 로마와 전투를 벌인 결과 소아시아의 타우루스 산맥 서편의 영토를 모두 빼앗겨 버림. 그리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결과 갖게 된 무거운 전쟁 배상금을 충당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한 왕국 내의 신전들의 재물들을 압류하기 시작. 또한 훗날 안티오쿠스 4세가 되는 자신의 아들을 로마에 볼모로 넘겨주게 됨.
- 그러던 가운데 안테오쿠스 3세는 남동부의 한 신전 재물을 압류하는 도중 살해 당하여 죽게 됨.
셀레우코스 4세 때부터는 마카베오2서(마카베오하)에서 언급되기 시작함. 마카베오 2서는 1서의 속편격은 아니며 동일한 역사를 보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쓴 책. 1서보다는 역사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지고 있음.
- 셀레우코스 4세 (187-175 BCE)
- 안티오쿠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셀레우코스 4세 역시 로마에 과중한 조공을 바쳐야 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하려고 함.
- 마카베오2서 3-4장에 이 시기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
- 성전의 관리 책임자였던 시몬이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와 시장 운영과 관련하여 대립하게 됨. 오니아스를 이길 수 없었던 시몬은 페니키아의 총독이었던 아폴로니우스에게 가서 예루살렘의 금고의 돈을 왕이 사용할 수 있다고 보고. 아폴로니우스는 행정 책임자 헬리오도로스를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금고의 돈을 요구했지만, 이 기금은 은 400달란트, 금 200달란트 정도이고 그 일부가 과부와 고아들을 위한 기금임을 설명. 그럼에도 [헬리오도로스](https://www.imj.org.il/en/exhibitions/heliodorus-stele)는 금고의 재물을 강탈하려 하였으나 끝내 하지 못함 (마카베오 2서는 이를 하나님의 개입으로 표현하고 있음)
- 헬리오도로스는 정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후에 셀레우코스 4세를 암살하게 됨 ([Appian, The Syrian Wars 9 * Livius](https://www.livius.org/sources/content/appian/appian-the-syrian-wars/appian-the-syrian-wars-9/))
- 안티오쿠스 4세 (175-164 BCE)
- 로마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와 왕위를 잇게 됨. 선왕들이 해 왔던 피지매민들에 대한 강압적인 정책을 고수. 유대인들에게 있어 최악의 폭군으로 기억되는 인물.
-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본래 그의 칭호인 ‘에피파네스’(현명한 신) 대신에 ‘에피마네스’ (미친 사람)라고 불렀음.
- 안티오쿠스 4세는 통일된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획일적인 헬라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갔음. 그러나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에게 가장 큰 눈의 가싯거리와 같은 존재였을 것. 안티오쿠스 4세는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고 그리스의 신들을 섬길 것을 강요. 이것에 마카베오 혁명의 단초가 됨.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전이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그리짐에 있는 성전은 그곳에 사는 이들이 하는 대로 나그네의 수호신 제우스의 신전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마카베오2서 6:2)
안티오쿠스 왕은 하나님의 단 위에 이방의 단을 세우고 그 위에서 돼지를 잡았으며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요세푸스, 고대사, 5,4) * 당시 유대인들은 보수파와 헬라파로 나뉘어져 있었음. 헬라 문화를 옹호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복장을 하고 그리스의 관습과 말을 습득함.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의 고유 신앙과 문화를 고수하였음. 안테오쿠스 4세는 유대지역의 도시들에 체육관과 신전, 경기장, 그리고 대중 목욕탕 들을 세웠음. * 안티오쿠스 4세의 폭정의 이면에는 유대 사회의 분란이 있었음.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죽자 안티오쿠스 4세는 오니아스의 어린 아들 대신에 그의 형제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함. (*마카베오서는 야손이 뇌물을 약속하고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서술 * 셀레우코스가 생을 마감하고 에피파네스라고 하는 안티오코스가 왕좌를 이어받았을 때,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이 부정한 방법으로 대사제직을 차지하였다. 야손은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은 삼백육십 탈렌트와 또 다른 수입에서 팔십 탈렌트를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마카베오2서 4:7-8).) * 이후 야손은 적극적으로 헬라화 정책을 추진. 그리스식 체육관을 예루살렘에 건축하고 운동경기를 개최 * 그러나 앞서 예루살렘의 금고를 왕에게 바치려고 했던 시몬의 동생인 메넬라오스가 더 많은 뇌물을 왕에게 바치고 기원전 172년 대제사장에게 임명됨. (*여기서 마카베오서와 요세푸스의 기록이 엇갈림. 마카베오서는 메넬라오스를 성전 관리자 시몬의 동생이라 적고 있고, 요세푸스는 대제사장 시몬 2세라 보고 있다. 두 기록의 견해에 따라 마지막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이 야손일 수도, 메넬라오스가 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에서 메넬라오스가 뇌물을 충당하기 위해 성전 금고에 손을 댔다는 혐의가 제기되어 소요가 일어나기도 함. * 안티오쿠스 4세는 네 차례에 걸쳐 애굽에 선전포고를 함. 이 전쟁은 기원전 173년부터 시작됨. 그리고 169년에 일시적으로 이집트의 왕위에 오르기도 하나 다시 그 자리를 내어 주게 됨. * 안티오쿠스 4세가 이집트에 대항한 두 번째 원정에서는 로마의 견제로 인해 퇴각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죽었다는 거짓 소식이 전해졌음. 그래서 대제사장직에서 쫓겨났던 야손이 무력으로 대제사장 직을 차지하려고 시도하였고 메넬라오스를 쫓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하고 암몬 땅으로 달아났다가 이집트로 다시 쫓겨나 죽게 됨. * 그러나 야손의 대제사장직 탈환 시도를 자신을 향한 유대의 반란이라 생각하여 잔인하게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고 제사를 중지시키고 종교 박해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됨. * 포악한 필립이 예루살렘의 총독이 되었고 성전 기물을 약탈함. 그리고 왕실 재정을 확충하고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해 인두세, 제왕세, 성전세 등과 같은 세금을 부과. * 안티오쿠스 4세는 169년에 이집트에 대한 마지막 원정을 나서게 되는데 이 때에도 로마의 견제로 실패로 돌아가게 됨. 그는 이에 대한 보복을 유대인들에게 하기로 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학살하고 헬라 왕조의 법과 종교에 순응하도록 강요 (마카베오1서 1:41 이하) * 마카베오서는 이에 대항했던 유대인들의 순교에 대해 적고 있음.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마카베오1서 1:62-63) 마카베오 2서 7장 또한 참고. * 이러한 박해에 저항한 반대 세력은 점차 커져갔고 이들은 나중에 하시딤(경건한 자) 혹은 바리새인(구별된 자)으로 불리게 됨. 이들은 율법주의를 고수함으로 헬라화에 맞서 종교 전통을 고수하는데 집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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